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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연 May 12. 2024

할머니는 널브러진 장화 몇 켤레를 보고 통곡했다

후회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많이 후회된다 난 할머니를 외롭게 했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려 보세요'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한 치의 고민도 할 것 없이 눈을 감고 한 곳으로 떠날 것이다. 바로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할머니댁이다. 계절은...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봉선화 꽃이 화사하게 피는 여름이 좋겠다. 여름날 나는 할머니댁 안방에 누운 채 종종 생각했다. 이 순간이 오래도록 나를 살게 하는 힘이 될 거라고. 


실로 그랬다. 어른이 되어도 '할머니!' 하고 찾은 할머니댁에서 나는 10살쯤 되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사랑만을 받았고, 이는 나의 내면을 단단하게 하는 뿌리가 됐다. 마당과 바로 연결되어 현관문처럼 쓰이는 부엌문이 드르륵 열리면, 할머니는 '하연이 소연이 왔냐' 하며 슬리퍼를 신고 나와 우리를 반겼다. 작은 키, 굽은 허리에도 누구보다 빠르게 걷던 할머니. 할머니는 다부지고 거친 두 손으로 우리 손을 꼭 잡았다. 가끔 집 안에서 일을 하다 미처 나오지 못한 날도 있었지만, 부엌에서 뒤돌아 보며 가장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집안일, 농사일을 조금씩 돕는 시늉만 내며 깔짝거리다가 '어휴 할머니, 나 좀 누워야겠어' 하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흙이 묻은 외출복을 훌렁 껍질 벗듯 자리에 벗어내고, 쿰쿰한 냄새가 나는 무거운 나무 서랍을 힘겹게 열었다. 비슷해 보이는 흐물흐물한 꽃무늬 여름 파자마가 대여섯 개쯤 있는데, 그중 가장 얇은 옷을 골라 입고 벌러덩 바닥에 누우면 천국이 따로 없었다. 수천만 원, 수억 원짜리 매트리스보다 편안하고 또 편안한 세상 최고의 장판이었다. 투박하게 발라진 노란 장판 사이로 가끔 개미가 기어가기도 했지만, 으이! 하고 옆으로 피해 누우면 그만이었다. 뒤뜰에서 마당으로 통과하는 산들바람에 달달달 미풍으로 회전하는 선풍기 바람까지 더해지면, 어떠한 근심 걱정도 흩날리는 꽃가루처럼 가볍게 사라져 흩어졌다. 


'이것 맛 좀 봐라' 하고 할머니가 들이미는 고구마, 먹다 돌돌 말아진 과자 봉지, 손에 묻어나는 쑥떡, 플라스틱 그릇에 담겨 쇠젓가락이 꽂힌 수박덩어리들이 머리맡에 쌓였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먹으면, 뭐랄까. 엄마 뱃속에 있는 것만큼이나, 따뜻하게 데워진 얕은 바닷물에 튜브를 타고 누워있는 것만큼이나, 마음이 편안해졌다. 쓰읍- 하. 게으르게 내쉬던 긴 숨에는 편안한 행복감이 묻어났다. 그것은 오로지 할머니댁, 내가 사랑하는 할머니댁에서만 느낄 수 있던 충만한 행복이었다. 


그런데 할머니댁을 사랑만이 넘치던 곳으로 추억하는 것은 이제 그만두어야겠다고, 철제 침대에 수의를 입고 누워 있는 할머니의 말라버린 두 볼을 어루어만지며 다짐했다. 할머니를 외롭게 둬서 미안해. 그곳에 그냥 둬서, 오래도록 외면해서 미안해. 


"할머니, 초강 안 가고 싶어?" 할머니는 평생을 살아온 정읍 초강을 떠나 1년 반쯤 전부터 원주 큰 삼촌댁으로 이사해 살기 시작했는데, 정읍이 아닌 원주로 할머니를 찾아뵐 때마다 언니와 나는 할머니에게 물었다. 죽을 때도 초강집에서 죽을 거라고 이야기했던 할머니가, 오래도록 살아왔던 초강을 떠난 후 그리워하고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기 위한 질문이었다. 할머니가 그리워하기라도 바란다는 듯, 치사하게 필살기로 방울이 사진도 들이밀었다. 할머니는 방울이 사진을 보며 어느 때보다도 밝게 웃었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냐는 질문에는 단번에 거절했다. "어, 별로 안 가고 싶다." 그만큼 큰삼촌과의 원주에서 지내는 생활이 좋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내심 큰 충격이었다. 돌아가기 싫다는 할머니의 할머니댁, 과연 할머니한테 집은 어떤 공간이었을까. 


할머니댁은 크게 총 2채의 독채 건물이 가운데의 마당을 중심으로 ㄴ자 형태로 있고, 옛날 변소로 쓰이던 화장실 및 창고 건물이 마당 대각선에 따로 떨어져 한쪽에 위치해 있다.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은 일자형태로, 가장 첫 번째는 부엌, 두 번째가 안방, 세네 번째에 작은 방이 연결된 일자형 주택이다. 아파트로 치면 '4bay' 형태의 집이다. 그리고 마당을 둘러싸듯 두 번째 건물이 ㄴ자로 붙어 있다. 그 건물도 세 개의 방으로 나뉘어 있고, 지금은 농기구를 두는 창고 방으로 쓰고 있지만 엄마가 어린 시절에만 해도 그곳에서 형제들이 지냈고 시장에 팔던 누에고치들이 잔뜩 살던 방이었다고 했다. 그러니 방으로 치면 총 8개의 공간이 있는 대형 주택인 셈이다. 


할머니가 언제 결혼했는지에 대한 답은 아직 엄마에게 카톡 답장이 안 와 잘 모르겠지만, 열여덟 쯤 했다고 생각해 보면 할머니는 75년 동안 정읍에서 지냈다. (할머니한테 언제 결혼했는지, 그땐 어땠는지 할머니한테 더 물어볼걸) 할머니는 망담에서 온 '망댐이떡'이었다. 이북에서 넘어온 뒤 아주 어려서 할아버지와 결혼하고 쭉 정읍에서 지냈는데, 할아버지와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이 정읍 '망담'이었다. 망담댁, 망담이댁, 망댐이땍, 망댐이떡이 된 것이다. 처음에 '망댐이떡'이라는 신기하고도 귀여운 어감에 호기심을 자아냈는데, 옆 집 할머니는 '물맹이떡'(놀랍게도 정읍 지역 이름에 '물맹이길'이 있다)이었으니, 망댐이떡은 그나마 평범한 수준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두고 시집온 지역의 이름으로 불리던 할머니들의 이름에서 당신들의 삶이 어땠을지, 내가 어림 잡아 상상하는 것 이상이었겠지. 


할아버지는 내가 초등학생 때, 2005년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할머니는 지금으로부터 19년 전부터 7남매가 북적이며 열 가족이 거뜬히 자고, 누에가 아삭아삭 뽕잎을 먹던 소리가 가득 채우던 그 집에서 혼자 주무셨다는 뜻이다. 모두 떠나고 함께 살던 할아버지도 떠난 이후 오로지 할머니만의 몫이 되고 만 그 집은 '할머니댁'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할머니는 그 이름 때문이라도 그 집을 포기하지도, 떠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할머니의 외로움에 대해, 나는 진심으로 헤아려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진심이란 무엇인고 하니, 예를 들어 내 친구가 주변에 아무도 없는 빈 집, 해가 지고 달이 뜨면 쥐 한 마리 다니지 않는 칠흑같이 어둠 속의 빈집에 며칠 놀러 간다고 이야기했다고 생각해 보자. 나는 걱정이 돼 매일 같이 전화했을 것이다. 누구야, 괜찮아? 간밤에 이상한 사람은 없었어? 심심하진 않아?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해. 


그런데 나는 할머니에게 한 번도 그런 따듯한 말을, 걱정 어린 말을 전한 적이 있었나. 내가 찾으면 그 큰 집에서 굳게 걸어 잠근 대문을 열고 웃으며 모습을 드러내던 할머니 모습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나. 그곳을 혼자서 지켜내야 했던 할머니를, 왜 나는 헤아리지 못했을까.


외로우셨을 것이다. 아니, 외로우셨다. 분명 우리에게 오래도록 말해왔다. 할머니집에 가면, 할머니가 매번 반복하던 말이 있다. "옆집도 죽고, 앞집도 죽고, 뒷집도 죽고, 여기 아무도 없어." 그리고 또 다른 레퍼토리. "아이고, 빨리 죽어야지." 나는 '할머니, 왜 그런 말을 해!'하고 무책임한 소리만을 하고 말았는데, 그것은 할머니가 외치던 간절한 신호였는지도 모르겠다. 너무 외롭다고. 7남매가 나고 자랐고, 일평생을 함께 한 남편이 떠난 자리, 혼자만이 남아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듯한 기분이 들진 않았을까. 과연 할머니가 정말 치매였을까. 그 서럽고 외로운 환경에서 수년을 지내야 했던 할머니의 증상을 '치매'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고요한 침묵만이 가득한 마을, 죽음이 그림자를 드리우는 빈 집에서 극한의 두려움과 외로움이 만들어낸 질병은 아니었을까. 


나는 할머니를 왜 나는 그곳에 그냥 두었을까. 직장에서 혼난 친구들이 우울증에 걸리진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혼자 남은 할머니가 우울증에 걸리리라 왜 생각해 본 적 없을까. 왜 할머니를 진심으로 대하지 않았을까. 마냥 어린아이처럼 굴었을까. 그렇게 잠깐 머물렀다 빠르게 떠나갔을까. 


할머니가 원주로 떠나기 전, 정읍 가까이 살며 할머니를 챙기던 금례이모에게 전화가 온 적이 있다. 할머니가 마당에 있는 장화들을 보고 통곡했다는 것이었다. 그 장화들은 할머니댁 옆에 있는 작은 텃밭들의 농사일을 할 때 쓰는 장화들이었다. 가끔 우리 집이, 또 삼촌네집이 가면 엄마 아빠 삼촌 나까지 바지를 겉어 붙이고 그 신발들을 신고 열심히 일을 했더랬다. 그런데 할머니가 그 신발들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엉엉 통곡했다는 것이다. 장화가 이렇게 많은데 왜 사람은 한 명도 없냐고. 


그즈음으로 해서 할머니의 상태는 나날이 안 좋아졌다. 딱 한 명 살아계시던 이웃집 할머니인 팽창 할매가 돈을 훔쳐갔다며 시작된 과한 의심과 걱정은 심해졌고, 마당에서 넘어져 허리까지 다친 까닭에 할머니는 노인 유치원, 노치원에 가야 했다. '요양원'의 '요'자만 나와도 질색팔색을 하며 싫어하시던 할머니였지만 아침에 갔다 저녁에 돌아오는 노치원 정도는 허용하는 듯했다. 아니, 오히려 노치원 픽업 버스 기사님을 그토록 반가워했다고 했는데 할머니는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그 사실이 뛸 듯이 반가웠는지도 모르겠다. 노치원을 1년 정도 다니던 할머니는 상태가 조금 더 안 좋아지면서, 드디어,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큰 삼촌네 댁으로 이사했다. 더 노쇠해지고 나서야, 외로움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다.


할머니가 '할머니댁'을 떠난다고 했을 때, 나는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속으로 잠깐 슬퍼했다. 아니, 많이 아쉬워했다. 할머니댁에서의 행복했던 추억이 모두 끝나 버릴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감정이 얼마나 찰나의 것이었는지 무관하게, 나는 얼마나 이기적이었나.  할머니가 할머니댁을 떠나기로 한 결심은 더할 나위 잘 된 일이었다. 풍악을 울리고 꽃가마를 태워 할머니를 모셨어야 할 일이다. 할머니는 '할머니댁'을 떠나 온 원주에서 생활을 시작하며, 새로운 '할머니'의 여정을 쌓기 시작했다. 방울이에 이은 털손녀 고양이 까미 초코가 할머니 주변을 사랑으로 맴돌았고, 장난기 많은 손녀딸 보림이 세라와 함께 했으며, 천사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상냥하고 다정한 큰 외숙모, 할머니가 평생을 가장 자랑스러워하신 큰삼촌과 함께 할머니는 다시 '가족' 일원이 됐다. 원주에서의 사진을 보면 할머니는 항상 함박웃음을 짓고 계셨다. 1년 반 동안 원주에서의 생활이, 그간의 깊은 슬픔과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어루만져 주었으리라 바라본다.


나는 후회하지 않을 줄 알았다. 언젠가 있을 할머니와의 이별에 대비해, 틈이 날 때마다 할머니댁에 갔고, 할머니와의 전화 통화를 녹음했고, 사진과 영상을 찍었으며,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후회된다. 지난날 할머니의 외로움에 대한 무심함이, 너무나 후회된다. 사랑한다면서, 왜 할머니를 헤아리지 못했을까. 이제는 추억 속에만 남아 버린 할머니, 내가 미안했어요. 곧 다시 만난다면, 꼭 손 잡고 말하고 싶다. 그동안 수고 많았다고, 얼마나 외로웠겠냐고. 그 외로움을 몰라주어 너무 미안하다고. 할머니는 할머니라 괜찮을 거라고 내가 착각했다고. 손녀딸이 너무 못나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만 할머니를 너무 사랑했다고. 


ㄴ자 구성으로 된 할머니집 마당. 여름이 되면 항상 풀을 멨다.
볕이 잘 드는 할머니댁 마당에는 여름이 되면 풀이 무성하게 자랐다.
할머니의 작은 텃밭에는 오이, 깻잎, 콩, 깨, 감까지 없는 게 없이 다 있었다.
'드르륵' 열리는 부엌문 앞에서 할머니와 방울이와 함께
여름이 되면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던 꽃, 할머니와 언니 방울이. 뒷 건물은 예전에 뒷간으로 쓰던 화장실. 할머니는 좌식 화장실이 생긴 후에도 항상 이곳에 가서 볼 일을 보곤 했다.
할머니댁에 일주일 정도 살던 때 노치원에 가던 할머니를 배웅했다.
할머니가 노치원에서 돌아왔다. 할머니는 전날 함께 잔 날 기억하지 못했지만, 반갑게 웃으셨다. 사람 사는 소리가 나니 좋다고 자기 전까지 몇 번이나 말했다. 몇 번이나.
귀여운 방울이. 할머니가 신고 다니던 샤넬 아우디 올림픽 로고 사이 어딘가의 따뜻한 털 슬리퍼.
우리가 떠날 때, 할머니는 초록 대문 앞까지 나와 우릴 배웅했다. 조심히 가라, 어여 가라, 또 오너라, 했다.
할머니 내가 많이 사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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