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소연 May 29. 2024

할머니는 모든 것이 싫다고 하셨어

밥상 위의 전쟁, 할머니가 하는 "밥 먹어라"의 진짜 의미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리 가족은 종종 할아버지가 실제 조기 머리를 좋아하셨던 걸까 아닐까를 두고 토론하곤 했다. '으이그, 그게 진짜 맛있었겠냐'라는 엄마와 '진짜로 내장 특유의 맛이 있어'하는 아빠. 나는 '실제로 좋아하셨을 거야' 파였다. 할머니가 타원형의 플라스틱 그릇에 조기를 두어 마리 구어 밥상에 올리면, 할아버지는 가장 행복해 보인다는 표정으로 조기 머리와 내장에 손을 빠르게 뻗곤 했는데, 그 짓궂은 표정이 어떻게 거짓일 수 있겠는가 싶은 것이다. 열 살의 어린아이의 눈을 완벽하게 속일 정도 연기를 너무 잘 해내신 탓인지, 나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우리 할아버지는 조기 머리를 좋아해'라고 믿곤 했다. 우리에게 통통한 살코기를 먹이기 위한 '안 먹기' 계략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안 먹기' 계략은 비단 할아버지의 몫만은 아니었다. 이 분야에서 둘째 가라 라면 서러운 월드스타가 있었으니 바로 우리 할머니, 33년생 박순례시다. 할머니집 부엌에 4명이 도란도란 둘러앉아 밥을 먹는 자리를 떠올리면 웃음이 푹 난다. 제비가 날아드는 평화로운 시골집의 식사 자리를 그리워하는 것은 아니다. 할머니댁에서의 식사는 평화로웠던 적이 없다. 오히려 소리 없는 전쟁에 가까웠다. 먹이려는 자와, 더 먹이려는 자의 전쟁. 할머니는 할머니의 몫을 나눠 나머지 인원에게 돌리기 위한 작업을 치밀하게, 또 빈틈없이 진행했고 나는 그 넘치도록 과한 사랑에 못 이겨 배를 땅땅 두들기며 항복 선언을 해야 했다. 


할머니의 식사는 밥 한 숟가락을 채 뜨기 전부터 '배부르다'는 밑밥을 까는 것으로 시작됐다. 할머니는 '짜구난다', '짜구나'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찾아보니 '짜구'는 '자귀'라는 말로, 개나 돼지가 너무 많이 먹어서 생기는 병의 한 종류로 배가 붓고 발목이 굽으면서 일어서지 못하는 증상이라고 한다. 남은 것은 뼈뿐이었던 30kg대의 마른 할머니, 두 입이나 먹고 배부르다고 손사래 치던 할머니가 '짜구'라니. 할머니... 할머니는 절대 짜구 안나! 


오래전 남녀가 겸상하지 않고 따로 먹던 습관이 남아 있었던 걸까. 할머니는 아예 밥상으로부터 등을 돌려 돌아 앉아 있거나, 밥그릇 몇 개나 겨우 올라갈 법한 아주 작고 낮은 밥상에 자신의 밥을 따로 놓아두기도 했다. 어머니는 짜장님이 싫다고 하셨지만 할머니는 모든 것이 싫다고 하셨다. 그것이 사실은 몸에 안 좋은 사탕, 생강 고자, 크라운 산도일지라도 무엇 하나 우리 입에 더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서야 할머니는 마음을 놓았다. 


밑도 끝도 없는 '안 먹기' 외에도 우리에게 더 먹이려는 작업은 분주하게 이뤄졌다. 바로 '반찬 돌려 막기' 스킬이다. 우리는 보통 네 다리가 달린 접이식 나무 밥상에서 밥을 먹었는데, 손만 조금 뻗어도 대각선 끝이 문제없이 닿는 아주 작은 밥상이었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화려한 반찬 돌려 막기 스킬을 보여줬다. 내가 손을 뻗어 파김치를 집어 먹는 순간 파김치를 내 밥그릇 앞에 가져다 두는 것이다. 그리고 또 깨죽에 손을 뻗으려고 하면, 어느새 깨죽은 할머니 손에 붙들려 내 국그릇 옆으로 연행됐다. 


이때 둘러앉아 밥을 먹는 인물에 '이서방', 그러니까 우리 아빠가 끼어 있는 날에는 더욱 빠른 '무한 반찬 회천'이 시작됐다. 아빠가 손을 뻗을 때마다 살아 움직이는 회전 초밥, 아니 회전 반찬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아빠가 먹으려는 반찬이 할머니 밥그릇 근처에라도 있는 날이면, 할머니는 벌떡 일어나 새로운 그릇에 새 반찬을 덜어 아빠 밥그릇 옆에 새로 셋팅을 해주고 나서야 숟갈을 들었다. 어떤 날은 밥 숟가락을 뜨기 전부터 철저하게 계산됐는데, '주요 인물' 가까이에 반찬이 적절하게 배치될 수 있도록 같은 반찬을 두세 개의 서로 다른 그릇에 나누어 담는 것이었다. 식사가 다 됐는데 아빠가 방에서 자고 있거나, 밖에서 해찰을 한다고 들어오지 않으면 '네 아빠 밥 먹으라고 해라'를 100번쯤 말했다. 내 어깨를 거친 손으로 툭툭 치기도 해서, 잔뜩 짜증이 난 내가 마당 문을 드르륵 열며 '아빠!!! 밥 먹으라고!!!!! 아빠 올 때까지 할머니가 나 괴롭힌다!' 하게 소리치게 만들곤 했다. 몰랐다. '밥 먹어라', '밥 먹어라'. 사실은 '사랑한다'는 말이었을 텐데. 


외식을 한다고 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할머니네 집으로 가는 삼거리에는 국밥집이 있어 종종 먹으러 갔다. 유모차를 끈 할머니와 함께 빠른 걸음으로 국밥집에 다다르면, 할머니는 식탁이며 의자며 손에 잡히는 것들을 빠르게 붙들며 자리에 힘겹게 앉았다. 그러면서도 할머니의 '안 먹기' 작업은 더욱 은밀하게, 분주하게 이뤄졌다. 방울이만 집에 두고 온 게 미안하니, 나누어 먹어야 하는 대상이 하나 추가됐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식사를 하기 전부터 양념장이 닿지 않은 고깃 덩어리를 휴지에 은밀히 감쌌다. 주인아저씨가 근처에 있으면, 무장 해제시키는 사랑스러운 미소를 보이며 '우리 개 갖다 줄라고' 하고 수줍게 웃곤 했다. 


차를 타고 시내에 할머니가 좋아하는 해물 칼국수를 종종 함께 먹으러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유감스럽게도 칼국수 4인을 시키면 세숫대야 같은 큰 그릇에 4인분이 함께 나왔는데, 생각해 보면 이것부터가 잘못된 것이었다. 함께 나누어 먹으니, 당신이 적게 먹어 우리를 더 먹이려는 계략이 유효하게 딱 맞아떨어지게 되는 것이었다. 칼국수와 함께 나온 맛있는 탕수육을 앞두고도 '짜구난다', '많이 먹으면 크~일나' 하면서 입 주변을 닦아내며 손사래를 쳤다. 그때 꼭 칼국수 한 숟가락에 탕수육을 야무지게 올려 할머니 입에 넣으면 '그것 참 맛나다잉' 하며 깔깔 웃으시고 음식을 처음 먹는 사람처럼 맛있게나 드시곤 했다.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한 사람당 한몫을 정확히 해내야 하는 레스토랑 코스요리를 함께 먹었더라면 어땠을까. 할머니는 과연, 습관이 되어버린 양보와 희생을 내려두고 자신만의 몫을 온전히 즐기길 수 있었을까. 아마 할머니는 그 모든 식탁 위의 규율을 어기고, 음식은 고사하고 한 사람당 하나씩 배급된 식전용, 메인 요리용, 디저트용 스푼을 보고 숟가락이 왜 이렇게 많냐며, 하나면 된다고 직원에게 안 쓴다고 돌려주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할머니의 사전에 당신만을 위한 '1인분'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할머니의 밥그릇 안에는 항상 우리의 얼굴이 따라다니나 보다. 배 곪지 않고, 잘 먹고, 잘 지내는 것, 그것이 할머니가 우리에게 바란 전부였는지도 모른다. 


할머니가 치매에 걸리고 나서는 이 습관이 남아서인지, 무엇이든 너무 덜 먹어서 자꾸 말라갔다. 따라서 '먹이려는 자'의 역할은 우리 몫이 되었다. 나와 언니는 할머니가 안 보는 사이 할머니 밥그릇에 야채며 고기며 반찬들을 새 모이처럼 가져다 두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떼잉!' 하면서도 몇 숟가락 더 받아먹으셨고, 끝을 모르고 계속되는 시도에 결국 할머니가 정색하고 '안 먹어!' 하며 고개를 획 돌려야 그만두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최근의 일이고 할머니의 '안 먹기' 혹은 '먹이기' 작업만큼 교묘하지 못했다. 


먹이는 것, 그것은 언제나 할머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할머니의 사랑은 항상 넘치고 또 넘쳤다. 내 앞으로 끊임없이 돌려낸 반찬처럼, 낮잠을 자고 나면 머리맡에 쌓여 있던 과일이며, 고구마며, 먹다 만 과자처럼, 그렇게 넘치고 넘쳐 있었다. 


할머니는 밤새 나의 이불을 덮어주느라 외려 나의 단잠을 깨웠고, 배가 터지겠는데도 계속 먹으라고 우리들을 재촉해 지쳐 나가떨어지게 했다. 그것이 할머니의 사랑이었다. 다시는 경험할 수 없을, 그 누구도 내게 줄 수 없는 할머니의 사랑. 넘치디 넘치던 사랑을 주시던 할머니를, '할머니' 하고 한 번만 더 부를 수 있으면.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할머니. 


할머니가 좋아하던 가게에서 수다 수다 
김치를 가리키는 할머니의 손가락
할머니네 뒤안. 할머니가 좋아하던 봉선화꽃이 활짝 피어있다. 장독대 깻잎 햇살
할머니가 머리 맡에 놓아둔 파란색 구멍 바구니에 비닐, 안에 담긴 음식은 뭐였을까
할머니가 좋아하던 삼거리 국밥. 할머니. 진짜 맛있었지. 
할머니가 원주에 간 후, 항상 함께 가던 식당에 우리끼리 가니 주인 아저씨가 물었다. 할머니는 건강 하시죠? 그러더니 과일을 내어 주셨는데 나는 그만 뿌엥 울어버렸다.
할머니, 짜구 안 나지? 거기서는 양보할 우리 없으니까, 맛있는 거 많이 많이 먹고 있어!


이전 04화 할머니는 널브러진 장화 몇 켤레를 보고 통곡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