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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연 May 01. 2024

장례식장, 그 참을 수 없는 유쾌함에 대하여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우리 이렇게 웃어도 되는 거야?

처음 장례식장에 도착했을 때, 어두운 계열로 엉성하게 맞추어 입은 우리들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마주 앉았다. 다들 옷장에 있는 옷 중 가장 어둡고, 덜 화려한 옷을 골라 입은 게 분명해 보였다. 누군가는 하얀색 티셔츠를, 또 누군가는 회색 후드티를 입기도 했다. 상복으로 입을 흔한 검은색 정장도 없는, 장례식장에 들어서면 뭐부터 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분명 어른이 된 지 오래지만 아직도 어린아이 같은 우리. 서로 전화를 걸어 '네이비색 카디건 입어도 되겠지?' 하고 묻는 우리. 33년생 박순례, 사랑하는 우리 할머니의 똥강아지들이 모였다. 


병관, 보림, 문환, 세라, 세영, 하연, 소연. 회사에서 보낸 장례식장 일회용 비품을 만지작 거리며 마주 앉은 우리들은 비슷한 또래의 사촌들로, 어린 시절 1년에 두어 번 할머니댁에 모이면 누구 한 명이 피를 볼 때까지 싸우고, 쫓고 쫓기는 눈물의 뜀박질을 계속하던 주인공들이었다. 특히 병관이랑 보림이는 맨날 머리끄덩이 잡고 싸웠어. 왜 그렇게 싸웠더라? 20여 년이 지나 버린 과거의 혈투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제대로 답하지 못했고 그저 깔깔 웃을 뿐이었다. 그렇게 바람 잘 날 없는 명절 3일이 빠르게 다 지나고 난 후에는, 그제야 집에 가기 싫다며 떼를 쓰고 울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 길고 길었던 추석, 설날이 '연휴'라는 이름으로 깡그리 묶여 지나가 버린다. 그 시절에는 그 3일이 어찌나 기다려지고, 또 길었는데.


겨울에 할머니집 마당에 눈이 많이 쌓이면, 큰외삼촌은 우리가 타고 놀 수 있게 눈썰매장처럼 눈 언덕을 만들어주었다. 그러면 그렇게도 재밌다고 까르르 까르르 몇 번이고 썰매를 탔다. 여름에는 집 앞뒤로 난 창문 덕에 바람이 솔솔 통하는 안방 바닥에 누워, 30년도 더 된 까만색 선풍기가 천천히 돌아가며 만드는 미풍을 원망했다. '강풍으로 틀면 안 돼?' 엄마와 할머니는 미풍을 회전으로 틀어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 있으면 이게 가장 시원하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 더운 여름에도 좁은 둘째 방에 모여 앉아 티셔츠를 한껏 끌어올리고 '배가 아파요'라고 말했고, 동그랗게 구긴 옷걸이 철사를 배에 가져다 대며 '배탈이 난 것 같네요'라고만 답하는 엉성한 의사 놀이를 즐겼다. 가장 안쪽 끝방에서는 의자를 쌓아 올려두고, 빨간 매트에 노란색 솔이 달린 카페트 바닥을 밟으면 죽는 규칙의 게임을 했다. '지옥탈출', '악어게임' 등 아무 이름이나 불러도 규칙은 같은 그 지극히 단순한 게임으로 우리는 쉽게 한마음 한뜻이 됐다. 물론 누군가 게임에 대해 '자신의 동네에선 이렇게 한다'며 새로운 규칙을 주장이라도 하면 또다시 전쟁이 시작되고 말았지만, 노릇노릇 익어가는 산적 꼬치에서 파를 골라내고 분홍색 맛살과 햄을 집어 먹으며 쉽게 한편이 됐다. 다해, 지혜 언니는 그런 우리를 보며 웃는 쪽에 가까웠으니 '어른'에 조금 더 가까웠다. 


그런 우리들이 까만 옷을 입고 마주 앉았다. 새까만 상복을 입으면 어두운 슬픔만이 가득 찰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착각이었다. "얘들아, 옷 갈아입어라." 매끈한 재질 때문에 정전기라도 튈 것 같은 검은색 개량한복을 외숙모가 건넸을 때, 우리는 금세 민망해졌다. 한참을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복을 입고도, 심지어 꺽꺽 울며 눈물을 쏟아내던 입관을 마치고도 꽤나 유쾌했고 또 씩씩했다. 무려 초코 케이크와 휘낭시에도 '배민'으로 시켜 먹었다. 때론 배꼽을 잡고 고개를 뒤로 재껴가며 웃기도 했다. 죽음을 가까이에 두고도 이렇게 웃어도 되는 건지 문득 의아해질 만큼. 


하지만 장례식장이라고 멈출쏘냐. 우리는 어린 시절을 마음껏 추억했다. 어렸을 때 이런 일이 있었지, 저런 일이 있었지, 뭐가 그리 재밌었는지 심지어 깔깔 웃었다. 이모 삼촌 외숙모도 예외는 아니었다. 힘들고 지친 기색에 구석에 앉아 어두운 표정을 지을 때도 있었지만, 시간이 나면 마주 앉아 작은 대화에도 웃었다. 오열하고, 핼쑥해져도, 얼굴에 그림자가 지지는 않았다. 그게 복 많은 우리 할머니가 남기고 간, 사랑하는 가족들의 모습이었다. (이런저런 '어른'들의 뒷 이야기가 있겠지만, 마음껏 '손녀'일 수 있는 상황에서는 그렇다고 믿고 싶다.)


할머니를 보낸 원주의 장례식장은 신발을 벗고 들어오면 앞에 부의금을 낼 수 있는 곳이 있었다. 그를 기준으로 오른쪽은 할머니를 모시고 절을 올리는 자리, 왼쪽은 식사를 할 수 있는 자리였다. 할머니는 슬하에 7남매를 두셨고, 각각의 손녀 손주들도 총출동하였으니, 다시 말해 오른편은 지나치게 숙연했고 왼편은 정신없이 시끌벅적였다. 남북분단이라도 된 듯한 그 극명한 온도 차이를 신나게 오갈 수 있는 이는 딱 두 명뿐이었는데, 만 4세 이하의 아이들, 이제 엄마가 되어버린 다해 지혜 언니의 아이들뿐이었다. 


"나는 나중에 장례식장을 하면, 나는 손님들이 밥 먹고 이야기하는 구역의 한가운데에 있고 싶어.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거 다 들을 수 있게." 내가 말했다. 이렇게나 하하 호호 웃고 떠들고 있는데, 우리가 이렇게나 오랜만에 만나 다시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것은 다 할머니 덕분인데, 할머니는 정작 그걸 못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것을 보면 가장 기뻐할 텐데. 할머니가 있는 쪽은 엄숙하고, 슬프고, 침울하게만 느껴졌다. 우리 할머니는 세상 작은 것에도 까르르 웃을 줄 아는 사람인데, 자꾸만 할머니를 혼자 두는 것 같았다. 자꾸만 술을 올리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술 한 모금 할 줄 모르던 우리 할머니. 지금 만취다, 만취. 


"그런 게 어딨어. 할머니는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거 다 듣고 있어. 엄청 웃고 계실걸." 언니는 답했다. 나는 또다시 금세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지만 병관이는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그럼 소연이는 나중에 제사상을 공중에 띄워 놔. 사람들 밥 먹다 다 체하게"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위로, 꾸역꾸역 그 이야기를 다 듣겠다며 죽어서도 한가운데를 차지하려는 나의 미래 장례식장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어머. 소연이는 무슨 고물상에서 일해? 무슨 당근에서 화환을 보냈어.' 한 마디를 해도 유머를 빼놓지 않는 금순이모의 호탕한 목소리를 들었을 때, '이모!' 하면서도 나는 또 깔깔 웃었다. 울다가도 웃게 되고, 웃다가도 울게 되는 이상한 장례식장. 죽음만이 가득하다고 생각했던 장례식장은 살아있음 그 자체였다. 오히려 묘한 생동감마저 느껴지는 곳이었다. 죽음 앞에서 비로소 살아있음을 실감하는 사람들. 슬픔 속에서도 기어이 웃음을 되찾는 사람들. 


사실 장례식장에서 마냥 웃음만 났던 것은 아니다. 마주하기조차 어려워 외면하고 말았던 두려움도 있었다. 자주 여행을 함께 가던 아빠 친구들은 할머니의 소식을 듣고 정말 빠르게 원주로 '날아' 왔는데, 아저씨들의 머리가 하얗게 세어 버린 것을 보고는 나는 두려웠다. 할머니의 죽음처럼, 사랑하는 나의 엄마아빠의 죽음도 머지않았으려나.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무서움과 두려움을 얼른 쫓아냈다. 그리곤 엄마를 바라봤다. 나는 할머니의 죽음을 경험하고 있지만, 엄마에게는 엄마의 죽음을 경험하고 있었다. 나도 나중에 저 감정을 겪게 되겠구나. 엄마를 잃는다는 건 어떤 기분이려나. 나를 이 세상에 있게 한, 영원히 나를 가장 사랑할 것 같은 엄마가 세상을 떠난다는 것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지만 그저 슬픈 것만은 아닐 거야. 엄마가 할머니처럼 93세까지 살고, 오래 투병하지 않고, 미래의 나의 딸과 이토록 슬퍼하며 죽음을 애도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복이겠단 생각도 들었다. 그전에 이별하지 않기를. 그 이별의 순간이 조금이라도 늦어지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엄마 아빠 영양제 사주고 헬스장 끊어줘야지. 여행도 많이 가야겠다. 


이상한 장례식장이었다. 할머니의 죽음을 앞두고도 마냥 슬프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대성통곡과 박장대소가 동시에 일어났고, 이 생이란 것이 참 허망하다 느끼다가도 거대한 경외감 앞에 작아지기도 했다. 이 모든 이상한 감정들이 구멍이 뚫린 헬륨 풍선처럼 질서 없이 날뛰었다. 그리고 이런 모든 감정의 소용돌이 앞에서 비로소 살아있다고 느꼈다. 나의 유년 시절을 꽉 채웠던 그 많은 얼굴들, 목소리들이 다 여기 있었다. 장례시장은, 살아 있음을 느끼는 곳이었다. 슬프기만 할 것 같았던 장례식장에서 나는 오랫동안 잃어버린 일상의 행복을 비로소 되찾았다. 



그리워할 순간들의 기록 

엄마! 내 상복 못 봤어? 
언니, 장례식장 다녀가면 고양이한테 귀신 옮을 수도 있대. 이리 와 봐. 왕소금 뿌려야 돼. (우리 가족 중 가장 야무진 사촌 동생 세라는 편의점 두 곳을 돌며 천일염 가는소금, 굵은소금을 샀다.)
오빠, 이거 언제 손으로 써. 나와 봐. 내가 엑셀로 정리할게. (일 때문에 가져간 노트북 엑셀 파일로 부의금을 정리했는데, 삼촌과 태준 오빠는 정리해 본 부의금 중 가장 빨리 끝났다고 감탄했다.)
병관아, 술을 언제까지 마신 거야. (병관이는 머리 끄덩이를 싸우던 보림이, 보림이 친구와 새벽 5시까지 술을 마셨다.)
세영아, 우리 왜 벌써 만났니. (세영이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바로 전 날, 서울 여행을 와서 나와 함께 놀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할머니 부고 소식을 듣고 다시 올라왔다. 뜻하지 않게 5시간 만에 상봉한 우리.)
소연아, 여기 반찬 좀 가져와 봐라. (칫. 이모는 나만 시켜.)
이모, 부조 카톡은 한 번에 10명씩 밖에 못 보내. 아휴, 됐어. 이리 줘 봐, 내가 보내줄게. 
이솜아, 이게 뭐야? (이솜이는 말을 못 하는 아가다.)
우주야... 우주야... (우주는 체력이 무한대인 3살 남자 아가다.)
아빠, 아빠 흰 셔츠에 까만 정장 잘 어울린다. (멋진 우리 아빠는 대관한 상복마저 참 잘 어울렸다.)



3일간의 장례식에 할머니댁에서 하루 더 쉬고 서울로 돌아가는 기차 안. 나를 기다리고 있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레베카 솔닛은 책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재해와 사고, 재난이 때로는 희망이 될 수도 있다고 이야기했는데, 그의 말이 조금 이해가 됐다. 


꺼이꺼이 목 놓아 울 수 있던 장례식장이 차라리 좋았다. 일상으로 돌아가면, 문득문득 곳곳에서 할머니의 부재를 깨닫고, 사무치게 그리워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가야 할 텐데. 점점 잊어갈 텐데. 


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한없이 어린아이처럼 웃고 떠들며, 그냥 그렇게 조금만 더 머무르고 싶었다. 조금만 더. 누군가의 사랑스러운 딸로, 지지고 볶고 웃고 싸우고 떠드는 사촌으로, '할머니' 하고 품으로 뛰어들던 똥강아지로. 조금만 더. 


작은 확신이 든다. 할머니의 죽음으로 짠 눈물이 범벅됐던 이 시간을, 머리가 깨지도록 울던 이 시간을, 나는 오래도록, 이상하리만치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49일 동안, 할머니를 보내는 글을 씁니다 

다음 글은 <할머니는 널부러진 장화 몇 켤레를 보고 통곡했다>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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