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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운용 May 04. 2023

전국노래자랑


일요일 낮 열두시.


총상을 입어 불편한 다리를 조금도  아랑곳않고 온동네를 돌며 대소사를 챙기던 아버지는 어김없이 집으로 돌아와 텔레비죤 채널을 9번으로 고정해놓으시곤 아랫목에 자리를 잡는다.


" 엄마도 잘 들리도록 소리 좀 키워봐라."


물기가 촉촉한 머리를 수건으로 닦아대면서 안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내얼굴을 쳐다보며 아버지는 손으로 텔레비를 가리켰다.


화면안에선 진행자인 송해가 특유의 친근하고 구수한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비가오고 바람이 세게 부는 날에는 전파가 약해서 화면상태는 불량했고 출연자의 목소리만 들렸는데 오늘도 영 상태가 좋지않아 보였다.


화질이 좋지않은 날엔 난 옥상으로 올라가 전파수신 안테나의 방향을 이리저리 돌려 가며 아래층에 있는 아버지와 목청을 높여 수신호를 주고받으면서 화질을 손 봐왔었다.


비바람이 치대는 좁다란 옥상난간을 밟고 올라선 다리는  사시나무떨듯 심하게  흔들렸어도  굴곡진 사연만큼이나 깊게 패인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주름이 잠시나마 옅어지길 바라며 시지프스의 돌무덤쌓듯

바람이 부는 방향을 따라 무수히 안테나를

돌렸다.


그들의 얼굴에 흔치않은 웃음꽃이 가득하길 바라면서 비바람과 사투를 벌였지만 화면상태는 좀처럼 개선되지않았다.


지지직 거리며 선긋기연습때와 같은 가로줄 그어짐이 여느때보다 심해 화면속 장면이 온전하게 구분하기 어려웠다. 아버지의 표정을 곁눈질로 살피니 얼른 옥상으로 올라가 손을 보라는 표정이시지만


오늘은 선뜻 소박한 효심을 발동할 의지가 생겨나지않아 텔레비앞에 쭈구려앉아 하릴없이 채너레버만 돌렸다.


또다시 옥상에 올라가 본들 별달리 나아질리도 없고 어젯밤 과음으로 쓰린 속을 한시라도 빨리 달래고 싶었다.


흔들림은 있어도 일단 화질이 좋아지자 아버지도 그만하면 됐다며 아들의 성의에 흡족한 웃음을 짓는다.


어머니가 들을수 있도록 볼륨을 크게 키우고 나서 부엌으로 난 쪽문을 열었다.


나는 쪽문으로 얼굴을 돌려 잘들리시냐며 어머니를 향해 크게 소리를 질렀다.


비도 와서 날이 쌀쌀하니 감자넣고 뜨끈뜨끈한 칼국수나 끓여먹자던 어머닌 벌써 한시간 가까이나 허리를 굽힌채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부뚜막에 걸터앉아 밀반죽덩어리를 도마에 올려 가지런히 채를 썰어 뜨거운 김이 피어나는 가마솥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저녁 절친한 친구 넷 중 맨먼저 장가를 가는 덕구의 함진애비노릇하느라 무리하게 마신 술탓에 불콰해진 얼굴로 귀가한 아들을 보며


" 내일 점심때 특별한 볼일없으면 나가지마라 "


던 어머님의 당부가 아침에 잠이 깰때까지 좀처럼 기억이 나질 않았다.


쪽문을 통해 밀려드는 어머니의 손길이  담긴 구수한 칼국수냄새가 잠결에도 코킅을 자극해 잠이 깬 것이었다.




어제와 같은데 내가 그때 아버지의 나이에 다다랐으니까 세월 참  무심타.


이제 그 분들은 땅속깊이 묻고 가슴깊이 묻은지 오래지만 아직도 텔레비 수신안테나를 붙들고 씨름했던 젊은 그때가 찐한 기억으로 남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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