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가슴이 이끄는 곳] 1부. 말라가 교환학생 이야기
[스페인, 가슴이 이끄는 곳]
1부 - 말라가 교환학생 이야기
1-1. 말라가에 도착하다
*BGM:: Death of a bachelor - Panic! At The Disco*
출국 전날, 가족들과 함께 인천 국제공항 근처 을왕리의 숙소를 예약했다. 한동안 마지막 한국 음식이라는 생각에 내가 좋아하는 보쌈, 그리고 을왕리 하면 빠질 수 없는 조개구이를 실컷 먹었다. 소주를 몇 잔 마시고 홀로 밤바다를 거닐며 친한 친구와 통화를 했다. 괜스레 울컥한 마음을 감추느라 애쓰며. 생애 첫 외국 살이. 그렇게나 원했던 오랜 꿈이었지만 막상 가족과 친구들을 못 본다는 생각에 마냥 신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그날의 을왕리 바다는 마치 내 복잡한 감정을 위로해주는 듯 반짝였다.
다음날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드디어 모든 게 실감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정신을 차리게 하는 결정적인 일이 벌어졌다. 내가 이용했던 핀에어는 학생을 대상으로 위탁 수하물을 2개까지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중 하나의 수하물이 기준 무게를 초과한 것이다. 그것도 캐리어 자체의 무게 때문에. 그래서 우리 가족은 부랴부랴 다른 가벼운 가방으로 짐들을 옮겼고, 다행히 무게 제한을 통과하고 나는 항공기에 탑승하게 되었다.
그리고 탑승 10분 후, 나는 깨달았다. 현금으로 환전했던 60유로가 기존 캐리어에 있었다는 것을.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덤벙거리기 대마왕인 나. 그래도 소매치기당한 것이 아닌 게 어디냐 라는 생각으로 애써 마음을 다스렸다. 아련할 새도 없이 나는 내 얼렁뚱땅함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이내 비행기 안에 있다는 생각에 신나기 시작했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나는 '나 홀로 여행 프로젝트'라는 이름을 걸고, 홀로 세계여행을 하며 이곳저곳을 누벼왔다. 대만을 시작으로 일본, 중국, 태국 등 해외여행을 하면서 내가 비행기 타는 일을 굉장히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맛없는 기내식이 나와도 나는 그 어떤 진수성찬만큼 기쁘게 먹었다. 기내식이라는 것 자체가 주는 설렘이 있다. 게다가 이번에는 장거리 비행이니만큼 기내식이 무려 2번이나 제공된다는 점! 사실 그것도 그렇지만, 애주가인 나는 와인이 무제한 제공이라는 점에 가장 신났다. 그렇게 나는 화이트 와인 3잔을 연거푸 마시고 지루할 틈도 없이 비행 내내 깊은 잠에 빠졌다.
한참을 자고 경유지인 '핀란드'에 도착했다는 기내 방송을 듣고 잠에서 깼다. 드디어 밟아 보는구나! 유럽 땅. 운 좋게도 랜딩 시간이 길어 핀란드 시내를 잠깐 둘러볼 여유가 있었다. 후텁지근한 한국의 8월 공기와는 달리, 처음 마셔보는 핀란드의 여름 공기는 시원하고 청량했다. 오버스럽긴 하지만 산 좋고 물 좋은 북유럽의 공기라는 생각에 유난히 상쾌하게 느껴졌다. 한껏 들뜬 마음으로 시내버스를 타고 핀란드 중심지에 도착했다. "와..." 정말 걷는 내내 내 입은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영화나 사진에서만 봤던 왠지 고풍스럽고 멋들어진 유럽 특유의 건물들, 테라스에 앉아서 여유롭게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 그리고 광장 한복판에서 악기들을 가지고 아름다운 연주를 하는 길거리 공연단들까지. 유럽에 대한 내 첫인상은 '여유로움' 그 자체였다.
도심에서 조금 벗어나자 큰 호수가 하나 보였다. 나는 3유로짜리 마트 피자빵을 사들고 호수 앞의 벤치에 앉았다. 투명해 보이는 호숫물을 바라보며 딱딱한 빵을 한가득 베어 무는 데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멍하니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데 조깅하는 사람들, 피크닉을 온 가족,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지나갔다. 그들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한국에서의 바쁘고 치열했던 내 일상이 떠올랐다.
수능을 다시 보고 또래보다 늦게 입학한 늦깎이 대학생이어서 그랬는지 나는 1학년 때부터 목표 기업을 정해두고 이를 위해 학점 관리, 대외활동, 자격증 등 참 열심히도 살았었다. 특히 이 교환학생을 합격하기 위해서 방학 내내 토익, 스페인어 공부, 자격증 공부 등 정말 정신없는 스케쥴을 보냈다. 당시 남자 친구와도 대부분 공부 데이트를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스페인 대학들 중에서도, 유독 내가 합격한 '말라가 대학교'의 경쟁률이 높았다. 그래서 더욱 긴장감을 가지고 이것저것 철저히 준비를 했었다. 그 결과, 나름 4:1의 경쟁률을 뚫었다는 말씀!
그렇게 철저히 준비하고 힘들게 얻은 기회인 만큼 즐겁게 잘 해내 보자 라며 스스로와 다짐하고서 나는 다시 공항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그토록 노래 부르던 '말라가'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러.
이내 도착한 말라가 공항.
따뜻한 날씨, 내리쬐는 태양, 우거진 야자수 나무.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있는 이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설렐 새도 없이 나는 무거운 짐들을 끌고 공항 앞의 택시에 올라탔다. 당시 시각은 이미 밤 10시가 넘어 공항은 한적했고 도시는 어둑했다. 그래도 택시 기사 아저씨에게 반갑게 "Hola!"를 외치며 몇 달간 배운 기초 스페인어를 열심히 연습했다. 그러나 안달루시아 특유의 사투리와 빠른 말투는 병아리 수준의 내게는 외계어와 같았고, 나는 결국 영어로 "Sorry, I don't speak Spanish that much.(죄송해요, 제 스페인어가 아직 부족해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 발언 이후 택시 안에는 정적만이 맴돌았다. 하하..
점차 시내로 가까워져 가자 드디어 내가 수없이 사진에서 보았던 말라가의 풍경이 펼쳐졌다. 비록 한밤 중이라 가로등 불빛에 은은하게만 보였으나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핀란드에서 유럽 풍경을 보고 신이 났던 나인데, 그때의 감정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행복했다. 내가 원했고 선택한 도시여서 그랬을까. 머릿속은 빨리 아침이 와서 이 풍경을 실컷 감상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한껏 들뜬 마음으로 택시에서 내려 예약한 호스텔에 도착했다. 부랴부랴 짐을 내리고 6인용 남녀 혼숙 방에 들어가 몸을 뉘었다. 피곤했던지 나는 시차 적응을 느낄 새도 없이 스르륵 잠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어떤 '멘붕'이 내게 펼쳐질지 예상도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