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을 떠나며
| 일러두기 |
서적·영화는 《 》, 논문·언론·그림은 < >, 법·조례는 「 」, 굿·노래는 ‘ ’로 표기하였습니다.
미국 자연자원보호청의 세계토질평가조사 결과에 따르면 북유럽에서 영구동토지대인 그린란드를 제외한 토양의 약 90%가 회복력은 높은 반면 생상성은 낮은 하위 등급 토질로 평가된다. 북유럽 신화 속 토르는 바위 거인과 얼음 거인을 부수고 죽은 자를 살리며, 대지의 여신과 결혼하여 수확철마다 인간 곁으로 돌아온다.
한국에도 비교적 최근 이름을 널리 알린 저승사자가 있다. 동명의 웹툰이 원작인 영화, 《신과 함께》의 강림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강림 도령은 제주도 무속의례 본풀이의 “강림 차사”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제주 ‘차사 본풀이’에서 인간 강림은 염라대왕을 찾아 저승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그의 눈에 들어 저승사자 직을 수행하게 된다.
영화 속 강림은 사고로 죽은 소방대원 김자홍의 영혼을 7번의 지옥 심판에서 변호하며 저승길을 인도한다. 강림이 읊어주는 우여곡절 많은 자홍의 삶은 우리네 인생살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재판이 거듭될수록 자홍은 강림을 신뢰하게 되지만 강림은 자홍의 생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문책한다. 달리 보면 강림은 자홍의 지옥행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변호하는 수호자다. 저승대왕들의 징벌에 앞서 자홍을 꾸짖고 달래 바른 길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결국 자홍은 인간의 불완전성을 깨닫고 강림에게 의지하여 한을 풀고 환생에 성공한다. 차사 강림은 인간의 윤리적 소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매개자다.
가난하고 못생겼지만 성품이 좋고 효심이 지극했던 온달은 궁에서 내쫓긴 평강공주와 혼인하여 공주의 덕으로 입고 먹으며 문무文武를 갈고닦아 장군이 된다. 평강공주에게 초점을 맞춰 보자. 아버지 평강왕은 공주가 어릴 적 자주 눈물을 보이자 자꾸 울면 바보 온달에게 시집을 보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공주가 혼기가 차자 왕은 상부上部 가문에 시집을 보내려 했지만 공주가 극구 고사하자 공주를 궁에서 쫓아내기에 이른다. 공주는 패물을 잔뜩 가지고 나와 온달과 혼인했고, 물심양면으로 온달을 지원해 교화시키고 끝내 왕에게 인정받는다. 공주는 쫓겨나는 와중에도 야무지게 궁의 보물도 챙겼고, 정략결혼을 피해 결혼한 남편도 보란 듯 출세했으니 마찬가지로 성공한 삶이라 할 수 있겠다.
언제부터인가 신화와 전설은 잊혀 갔다. 실증주의나 무속신앙 말살정책과 같은 정부 차원의 제재도 망각의 주된 요인이다. 혹자는 설화가 논리나 과학으로부터 동떨어진 상상력에 그친다며 폄훼한다. 구비문학이라는 특성상 텍스트에 비하여 이야기의 변화가 유동적이며 일관성이 낮고, 때로는 기승전결의 부재까지 목격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의 근거는 도리어 설화의 가치를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설화는 잠들어 버린 역사 속에서 당대인들의 의식과 생존 양식, 문화를 채굴해낼 수 있는 광맥과 같다. 문화의 가치는 결코 가격으로 환산할 수 없다.
피땀 흘려 수확한 공물을 바친 선인들은 제주에서 태어난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며 도읍에서의 삶은 마냥 낙원일 것 같아 부러워했을 것이다. 이러한 양가적 감정이 누적되어 "제주=주변부”라는 집단의식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제주 신화에 반영된 주변부 인식은 버림을 받았거나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있는 주인공이 고난을 극복하고 한을 풀어 신이 된다는 서사 구조로 나타난다. 만일 주인공이 좋은 배경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반드시 갖은 수난을 거치고서야 신이 될 수 있다. 당대 제주인들의 사조와 문화적, 역사적 배경이 설화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Inherent Land Quality Map>, 《NRCS》, https://nrcs.usda.gov.
<柑橘封進>, 《耽羅巡歷圖》.
Paul Ricoeur, <Science and Ideology>, 《From Text to Action》, Evanston: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91.
사진출처 | unplash.com; 탐라순력도; NRCS(nrcs.usda.gov)
* 막간 상식 *
한라산은 불과 1,000년 전 화산 분출이 있었고, 지금도 지하 10km~55km 지점에 마그마 용융체가 존재하는 활화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