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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묘 Sep 19. 2022

인도에서 깨달은 것

인도 우다이푸르

아마 그것이 가장 지독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내가 마침내 나의 내면에 숨겨진 추악함과 잔인성을 보았을 때,
나는 겁에 질려 나 자신에게서 등을 돌렸다.
<달의 궁전> 폴 오스터

바고레 키 벨리 공연을 보러 갔다.

맨 앞에 앉으려고 일찍 도착했지만 티켓 파는 곳에 잔돈이 없어 기다렸다.

패밀리가 진행하는 공연인지 엄청 서툴렀다.

폭이 넓은 치마를 입고 빙글빙글 돌거나 둘이 손을 맞잡고 돌거나. 

쇠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이리저리 걷다가 빙글빙글 돌거나. 

맨 앞에 앉았더니 표정과 실수가 다 보였다.

입장 전 말다툼을 하고, 인형의 줄을 놓치고.


다름 차례로 두 여자가 나와 작은 심벌들을 치며 춤을 추었다.

발등부터 무릎까지 조그만 심벌들이 매달려 있었고, 

심벌 끈을 빙빙 돌리며 손 한 번 찰랑 발 한 번 찰랑 소리를 냈다.

두 여자는 모녀 같았다. 

생김새도 비슷했지만 튀어나온 하얀 앞니 네 개가 똑같았으니까.

앞니가 돋보여 난 그 앞니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날씬한 쪽이 딸 같았는데, 딸은 실수할 때마다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칼을 꺼내 물었다.

튀어나온 하얀 앞니의 쓰임새가 이거였구나!

칼을 물었다고해서 칼이 쓸모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칼을 물고 심벌을 쳤다. 앞으로 수그렸다 폈다 하면서.


마지막으로 뚱뚱한 여자가 머리에 항아리를 얻고 나왔다.

심벌 공연 때 뒤에 앉아 어울리지 않게 심벌을 두드렸던 아주머니.

도대체 왜 나온 거지? 의심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진가는 항아리에 있었다.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추는 춤은 그야말로 몸부림. 저게 쇼인가?

여인은 흥이나 노래를 따라 불렀다.

머리에 항아리를 이고 바닥에 앉아 몸을 구부린다던지 

납작한 쇄 접시 위에 올라간다던지 하는 게 과연 묘기일까? 

인상적이었던 것은, 동작이 끝날 때마다 뒤 아치 아래에 손을 올리고 두 번 신께 기도하는 모습이었다.

기도가 끝나면 걱정스럽던 얼굴이 돌변해 춤을 추었다.

그녀의 변수는 박자에 있었다. 

춤이라고 하기에는 꿈틀거림이었지만 느리게 작은 동작들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박자를 빨리하고 항아리를 얹은 채 무대를 한 바퀴 돌았다.

항아리가 하나에서 두 개가 되었을 때.

그리고 그 위에 두 개를 더 올려 네 개가 되었을 때. 이게 끝이겠거니 했다.

그러나 네 개 위에 세 개를 더 올렸을 때, 

이미 내 입은 쩍 벌어져 있었다.

묘기가 놀랍고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학대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여성은 목과 허리가 없었고, 옆보다 앞 뒤가 더 빵빵한 거구였다.

그냥 걷거나 앉거나 눕는 걸 보는 게 신기할 정도.

그러나 머리에 항아리를 쌓고 눈 화장이 온통 번진 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잠시 기도를 하고 다시 굳은 얼굴을 펴며 무대를 돌았고.

가여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이게 쇼란 말인가? 가슴 아프게 하는 게! 

도대체 저 여인은 왜 저러고 있나?

쇼가 끝나자 항아리 아주머니는 퇴장하지 않고 웃음기 전혀 없는 사회자 옆에 서 있었다. 

한 여행객이 나와 큰돈을 주었다. 다른 사람도. 또 다른 사람도.

무겁고 늙고 초라한 여성을 내보낸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 

항아리 아주머니는 오랫동안 퇴장하지 않고 팁을 챙겼다.

출구에는 돌아가는 관광객들 상대로 장이 펼쳐졌다. 

인형극을 했던 사람은 인형을 팔았고. 다른 공연자들도 저마다 물건을 팔았다. 


쇼를 했던 소녀와 여성들은 사탕 봉지 같은 옷을 입고서 불빛에 반짝거렸다.

재잘대고 웃고 빙빙 돌고 마치 축제를 놀러 온 사람들처럼.

그러나 반전이 있었다.

다른 사람 쇼에서 뒤뚱거리며 무대를 망치던 덩치 큰 늙은 여성이

마지막 한 펀치 두 펀치 내 얼굴을 후려치며 말하는 것이었다.

"봐라, 그리 어설프지 않아. 여기 우리 생계가 있다고."

그리고 속삭였다.

'흘러가도록. 그럼 흐르겠지. 난 그냥 받아들일 거야. 되는 건 되고 안 되는 건 안 되니까.'

인도에서 놀란 건 이거였다.

내가 결정하고 조정한다고 생각했던 시간이

사실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갔다.

계획하지 않았던 일들이 되어 갔고, 계획한 일들이 어그러졌다.

삶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내 손 밖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다디이푸르의 밤은 추웠다.

햇살 좋은 다리 위에서 몸을 녹이며 기다렸다. 도마뱀처럼.

몬순 팰리스에 같이 갈 동행을 구하고 있었다.

혼자 오토릭샤를 타고 멀리 외진 곳에 가고 싶지 않았으니까.

여행객들이 무조건 건너는 다리라며. 

다리에 서 있으면 한국 사람을 만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과연 동양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국적이 애매했지만.

한국어로 말을 걸고 대답 없으면 관두자.

한국 사람? 놀랍게도 한국 사람이었다. 

한국인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말에 한국 남자는 몹시 실망했다.

우린 안전하게 릭샤를 탔고 서로의 사진을 예쁘게 찍어주었고 

돌아와 치킨 마크니를 배 터지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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