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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나를 돌보는 시간

by 담은

오랫동안 나의 마음을 들여다볼 겨를이 없었다.

가족, 직장, 타인의 기대라는 크고 작은 책임들에 휩쓸리다 보니,

내 안의 진짜 목소리는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일상의 바쁜 소음에 가려진 내 마음은 마치 잊어버린 책처럼

어딘가 마음 한 귀퉁이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흐린 오후, 나는 동네 책방을 가기로 했다.

마음이 어지럽고 복잡할 때

책들이 기다려주는 책방을 가곤 했었다.

차창 밖으로 흐르는 풍경들이

조금씩 내 마음을 진정시켜주었다.

도착한 곳은 정원이 예쁜 작은 서점이었다.

초여름 햇살을 머금은 장미들이 정원 가득 피어있었고,

붉고 노란 꽃잎 위로 맺힌 투명한 이슬방울이 반짝였다.

바람이 스치며 장미가 흔들릴 때마다,

공기에 장미가 핀 듯 숨 쉴 때마다 느껴지는

장미향이 코끝을 간지럽히며 마음을 차분히 감싸주었다.


책방문을 열자, 책남새가 은은히 내 코끝을 간지럽혔다.

책장에 정리된 수많은 책들, 햇살이 하얗게 내린 테이블과 의자.

그 모든 것들이 나들 잘 왔다며 환영해 주는 것 같았다.

나는 책장 앞을 천천히 걸으며 손가락 끝으로

책들을 살며시 쓸어 만져보았다.

반질한 종이의 질감과 그 위에 새겨진 제목들을

읊조리며 조금씩 긴장이 풀어졌다.

그 책장 속에서 한 권의 책을 꺼내 펼쳤다.

깨끗한 종이 위에 새겨진 글자들이

내 눈을 통해 마음으로 들어오는 듯했다.


책을 들고 창가옆 의자에 앉았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바람에 살짝 흔들리는 나뭇잎소리가

책 속의 문장들과 섞여 내 안으로 조용히 스며들었다.

글자를 따라가며 내 마음속에

오래도록 묻어두었던 질문들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을 원하고 있을까? 무엇이 진짜 나를 행복하게 할까?


책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지만

때론 우리가 몰랐던 우리 자신을 만나게 해주기도 한다.

나는 조용히 책장을 넘기며

몰랐던 내 내면을 마주하기 시작했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커피의 고소한 향이 코끝을 맴돌고, 따뜻한 온기가 손끝으로 전해졌다.

마음이 점점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햇살은 커튼 사이로 부드럽게 내리쬐고, 그 빛이 나를 토닥이는 듯했다.

책방의 고요한 공기와 책장 사이의 잔잔한 숨결이

내 마음의 소리를 들어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책 속에 나는 내 안의 숨겨진 이야기를 발견했다.

외면했던 감정들, 잊고 지낸 꿈들, 조용히 마음을 두드리던 질문들,

아늑한 공간 안에서 내 마음 깊은 곳에 묻혀있던 목소리들을 들으며

나 자신과의 새로운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나 자신과의 대화다.

나를 돌보는 시간이랑 내 안의 진정한 나를 발견하고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사랑하는 순간이었다.

그런 시간을 통해 나는 조금씩 더 단단해지고 있었다.

그 후로 나는 그 책방에 종종 찾아간다.

문을 열 때마다 마음이 설렌다.

새로 진열된 책들의 표지를 살펴보고,

익숙한 제목을 눈으로 읽으며 문장을 상상하는 일은 내게 큰 위안이 되었다.

책방은 내게 따듯한 안식처가 되었다.

무거운 삶의 책임과 일상의 소란을 잠시 내려놓고,

조용히 나와 마주하는 공간.

그 속에서 나는 마음의 숨을 돌리고,

조금씩 나다움을 회복해 간다.

어떤 날엔 책 속 문장하나가 내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마치 나를 위해 써놓은 문장.

나조차도 알기 어려웠던 감정을 콕 찍어 풀어놓은 문장.

그 순간 나는 혼자가 아님을 느낀다.

나를 이해해 주는 문장이 존재한 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살아갈 힘을 얻는다.


오늘도 나는 책방문을 연다.

나를 기다리는 수많은 이야기들과 조용히 숨 쉬는 책들이 그곳에 있다.

책은 책방에서 나는 내 안의 소중한 나를 다시 발견하고

더욱 깊이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그 조용하고 아늑한 시간들은

이제 내 삶에서 결코 놓칠 수 없는 가장 따뜻한 순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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