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저희 반 아이들과 작년부터 아침 조회시간을 10분 앞당겨서
아침 독서시간을 만들었습니다.
독서가 너무 중요하지만 아이들이 스스로 독서를 하기란 요즘 같은 상황에서는 정말 어렵거든요.
그래서 3월 첫날부터 아이들에게 책을 두 권씩 가져오라고 하고
저 역시 아이들이 읽을만한 책을 가져와서 학급문고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이것을 관리하는 도서부를 조직했죠.
그러나 숙제나 시험 같은 강제적인 장치가 없다면 공부의 지속성이 떨어지듯
독서 역시 그냥 책만 읽게 해서는 그 활동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독서기록장을 만들게 해서
2주에 한 권씩 독서기록을 적어서 제출하게 합니다.
물론, 기록의 방식도 제가 정해둔 구조를 따라야 합니다.
줄거리 요약 + 인상적인 문장이나 장면 3개와 이유 + 이 책이 내 삶에 갖는 의미
이것이 기본이이고, 그 외에 자신이 추가하고 싶은 요소가 있다면 더 넣어도 됩니다.
이렇게 아이들은 한 달에 2권씩 자신의 독서 경험을 글로 적어서 저에게 제출하고,
그러면 저는 일일이 아이들의 독서기록장을 읽고 직접 제 의견을 달아줍니다.
힘들지만 아이들의 생각을 알아보고,
아이들의 지적 수준을 파악하는 데에는 너무나 좋은 방법이죠.
때로는 아이들이 말로 하지 못했던 개인 상황을 적기도 합니다.
그러니 독서기록장은 저와 아이들의 아주 내밀한 소통의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대체로 저의 말을 잘 따르니 이 활동이 잘 되기도 했지만
제가 2023년 5월에 첫 책인 '생각훈련 독서법'을 출간하고 나니
아이들은 선생님이지만 작가이기도 한 저의 권위와 전문성을 인정해서 더욱 잘 따르는 것 같습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영어를 좀 더 가르쳐서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독서는 그들의 생각의 틀 그 자체를 만들어 주는 것이라...
전 정말 목숨 걸고 하고 있습니다.
방학전에 1권, 방학 과제로 1권을 읽게 했는데
개학날 독서기록장을 걷어보니, 출석한 아이들은 3명 빼고 전부 냈더군요.
그리고 개학 이틀째인 오늘, 제출 안 한 아이는 1명뿐이었습니다.
늘 자고 있는 아이, 하고 싶은 게 없어서 마음이 시끄러운 아이.
전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희한한 사건을 일으키고 다니는 아이.
그 아이만 빼고 다 냈다 이겁니다.
1학기에도 여러 사건으로 저를 바쁘게 했던 그 아이는
한때 저에게 반항이라는 것을 하기도 했지만,
함께한 끈끈한 대화를 통해 결국 저에게는 마음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저와의 관계와는 별도로
학교에서는 거의 잠만 자는 학생으로 변해버렸죠.
그런 이 아이가 유일하게 하는 것이 바로 독서입니다.
심지어 1학기 말에는 도서관에서 주는 다독상을 받을 정도죠.
오늘 내겠다고 한 약속을 어기고 아이는 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독서기록장을 가져오긴 했더라구요.
남아서 쓰고 가라고 하니 순순히 교무실로 와서 독서기록장을 열어두고 책을 보고 있던 아이.
이미 깨버린 약속이었지만 아이의 그런 모습을 보니 기특했습니다.
사는 게 재미없다고 하는 아이인데... 그래도 이렇게 말을 들어주는구나 했습니다.
"샘이 남으라고 하니 남았네? 잘했다. 그래도 자꾸 나와의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지 않아서
내가 실망하려고 한다. 그러기 싫은데."
"죄송해요."
죄송하다는 말만 내뱉고 다시 아무 말 없이 계속 책을 보던 아이를 지켜보다
저는 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습니다.
"샘은 널 믿는다. 앞으로도 믿을 거다. 이런 내 마음 안다면, 약속을 잘 지켜줘."
믿음이라는 의미의 가장 기본적인 영어 단어는 belief가 되겠죠.
그러나 저는 이 아이에게 faith를 가집니다.
belief보다 훨씬 강하고 잘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지녀서, 종교적인 믿음마저 의미하는 이 단어.
저는 그만큼의 믿음을 주고 싶습니다.
갈팡질팡 질풍노도의 시기를 그대로 겪고 있는 아이의 알 수 없는 불안한 마음.
그런 아이를 보고 있으면 저마저 불안해집니다.
그러니, 제가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아이를 놓지 않으려면
변동 가능한 평범한 믿음은 부족합니다.
믿는다. 항상. 네가 너의 길을 찾을 때까지. 내일은 약속대로 독서기록 잘해서 가져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