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성장하는 데에는 실제적 경험이 필요한데, 왜 경험이 필요한지는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것이 함정이다. 나에게는 영화모임이라는 색다른 경험이 뜻하지 않게 나의 지평을 넓혀 줄 직접적인 경험이 되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아직까지도 정확히 단어 몇 개로 나를 정의하기는 힘들다. 이럴 때 내가 써온 쉬운 방법이 소거법이었다. 가장 나답지 않은 자질들을 먼저 떠올리며 지워가는 것이다. 적어도 이건 아니다 라는 것들만이라도 안다면 나를 정의할 선택지가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나의 소거목록에는 많은 단어들이 올라가 있었다. 귀여움, 애교, 꼼꼼함, 절제 등등. 그리고 소심함! 그렇다. 소심함은 절대로 나와 맞지 않는 녀석이었다. 지금껏 나의 목록을 차지하고 있던 이 한 단어, 소심함을 목록에서 끌어내려야 할 순간이 올 것이라고는 당연히 생각조차 해본 적 없었다. 그리고 이런 판단이 나의 경험부족에서 나온 선입견이자 무지이고 오만이었음을 생애 첫 영화모임에서 알게 되었다.
무엇이든 날이 정해지면 시간이 빨리 간다고 나의 베프는 말하곤 했는데, 영화 모임이 딱 그랬다. 모임에 대한 제안을 받고 나니 정말 순식간에 3주가량이 흘러갔고 어느덧 첫 영화 모임이 있는 아침이 되었다. 이미 며칠 전부터 대표님께 모임 운영자가 알아야 할 가이드라인도 받았고 내가 진행할 첫 영화에 대해서도 단단히 준비를 했기 때문에 긴장할 일이 전혀 없을 것 같았지만 당일이 되니 생각보다 많이 긴장되었다. 출근을 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퇴근 후 진행하게 될 모임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모임 시간은 저녁 7시 반이었지만, 난 한 시간 정도 일찍 모임장소에 도착했다. 도착하니 나를 기다리시던 대표님께서 나를 반갑게 맞아 주시며 모임의 장소가 될 아래층으로 나를 안내해 주셨다. 자신이 함께 있어주면 좋겠지만 일이 있어서 동참을 못하신다며 파이팅을 외쳐주셨다. 대표님이 나가고 낯선 공간에 나 혼자 덩그러니 남아 참가자들을 기다리자니, 마치 임용시험 때 면접시험의 차례를 기다리던 때처럼 긴장감이 온몸을 서서히 관통하며 지나가기 시작했다. 시작 시간이 10분도 채 안 남은 걸 확인한 나는 공책과 펜을 꺼내서 오늘 진행할 영화와 질문에 대해서 되짚어 보며 의연한 척해보려고 했으나, 공책을 붙잡은 손이 파르르 떨리는 통에 되려 긴장감이 높아지고 말았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참가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공간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영화 모임이라 그런지 최대 모집인원이 8명이었지만 5명이 신청을 했다고 들었다. 12월의 차가운 날씨 탓에 마스크를 쓰고 목도리까지 두르고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드디어 올게 왔구나 라는 생각에 몸에 힘을 바짝 주고 빙긋이 웃어 보였다. 적어도 나는 빙긋이 웃었다고 기억한다.
참가자들이 소파나 의자에 앉는 동안 가운데 자리에 앉아있던 나는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다들 자리에 앉은 걸 확인하고 나서 나는 내 소개를 시작했다. 참가자들 대부분은 이미 이 공간에서 독서모임을 하고 있던 터라 친분이 있어 보였고, 그래서 다행히 분위기가 무겁지는 않았다.
"안녕하세요? 만나 뵙게 돼서 너무 반갑습니다. 저는 작가이자 교사인 제이문이라고 합니다. 이 공간에서 이런 모임을 하게 돼서 너무 기쁩니다... 블라블라블라..."
그날의 내 첫인사와 자기소개를 떠올려보니 지금 생각해도 너무 딱딱하고 촌스럽고 틀에 박혀있었다. 참나. 난 이것보다 담대한 사람인데,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반장만 하던 사람인데, 하루에도 120명이나 되는 아이들 앞에 서는 사람인데, 영화 방송을 10년째 진행하고 있는 사람인데, 도대체 왜 이렇게 말을 못 하고 위축되어 있는 거야? 그동안 살아오면서 말을 '너무' 잘한다는 말만 듣고 살아온 나는 순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고, 부담스러운 몸뚱아리만 가진 웬 덩어리가 그 자리에 앉아서 성능 낮은 AI처럼 떠들고 있었다.
휴. 다시 생각해도 너무 땀나고 숨 막힌다. 초반의 그 30분의 긴장감을 어떻게 이겨내고 대화를 풀어나갔는지 사실 기억도 나지 않는다. 정말 다행이었던 것은, 대표님의 선견지명 덕분이었는지 참가자의 니즈를 잘 파악한 영리한 선택 덕분이었는지, 대화의 주제가 사랑이었고 참가자들끼리의 친분관계가 있어 30분 이후부터는 초보이자 '소. 심. 한' 진행자의 역할이 많지 않았어도 모임이 알아서 잘 굴러갔다는 것이다. 심지어 모임이 끝나고 나서는 재미있었다는 칭찬까지 받아버렸다.
무엇을 했는지 모를 두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모임이 끝났다. 북카페를 나서자 실소가 터져 나왔다. 마스크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미친 사람처럼 웃으며 혼잣말도 실컷 할 수 있었다. 그렇게까지 긴장을 하다니.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까지 위축이 되다니. 모임에서 튀어나온 나의 낯선 모습이 너무 어이없어 웃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모르던 나의 모습을 발견한 것에 묘한 기쁨이 피어오르기도 했다. 이제는 다 끝나버렸나 했던 나였는데, 아직도 발견할 내가 내 안에 들어 있었다는 사실이 그동안 크게 자리했던 힘듦의 자리를 대신할지도 모른다는 묘한 희망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잘할 수 있겠다. 다음번에는 다른 방식으로 해보자. 소심한 너도 나름 귀엽더라.
소심할 줄도 아는 영화모임의 운영자는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무사히 첫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용감하게도 벌써 다음번 모임을 기대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