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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 에세이스트 J Jun 03. 2023

잠재된 불씨는 언제든 발화한다

이니셰린의 밴시(2022)

관계의 단절은 한쪽의 일방적 선언에 의해 비롯되었다. 어제까지의 친구는 비정하게 등을 돌렸고 그에게 느꼈던 다정함은 일순간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선언한 자는 할 일을 했다는 듯 자신이 원하는 일상을 이어나가지만, 선언을 당한 자는 선언을 당한 그 순간 일상이 정지되어 버렸다. 익숙한 관계, 안전했던 세상에서 예기치 못하게 쫓겨난 그 한 사람에게 선택은 주어지지 않아 보였다. 적어도 처음에는.    

  

21세기의 셰익스피어로 불리우는 마틴 맥도나 감독의 최신작 이니셰린의 밴시는 제 79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첫 상영을 한 이후 즉각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찬사를 받으며 2022년 최고의 화제작으로 떠올랐고 전 세계 영화제에서 130개가 넘는 상을 수상했다. 특히 이 영화가 개봉된 2022년은 아일랜드 내전 100주기였기 때문에, 아일랜드 내전이 끝나가던 1923년을 배경으로 만든 이 영화의 모티프가 아일랜드 내전임은 자명해 보인다. 또한 가장 아름다운 아일랜드의 모습을 배경으로 영화를 만들고 싶어했던 감독의 바램이 100퍼센트 충족되고 남을 만큼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이니시모어섬의 풍광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답다. 


1. 일방적 단절이라는 폭력


어느날 갑자기 절친이었던 콜름의 돌발적 절교 선언. 작은 섬 이니셰린에서 누구보다 콜름과 친했던 파우릭은 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심지어 자신에게 말을 걸때마다 손가락을 하나씩 자르겠다는 콜름의 엄숙하다 못해 공포스러운 선언은 그 지나침으로 인해 파우릭을 더욱 혼란스럽게 할 뿐이다. 파우릭과의 시간이 무의미하고, 이제부터 자신이 해야할 일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말을 걸지 말아달라는 콜름의 이기적이고 일방적인 선언은 파우릭의 일상을 어지럽히고, 정체시켜 버린다. 그러나 콜름의 일상은 원래대로 돌아가고 심지어 새로운 친구들을 자신의 일상으로 불러들여 그 어느때보다 활기차다. 관계에서 배제된 일방, 그 일방에게 이보다 더 잔혹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우리가 맺는 수 많은 관계들은 양방의 필요에 의해 성립되어 있는 것이며 대부분 시의성을 요한다. 즉, 삶의 어느 시점에 필요한 자들이 모여 형성된 관계이니 만큼, 삶의 시점이 이동된 후에는 자연스레 와해될 가능성을 상시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관계에는 이런 식의 성립조건에 예외되는 것들도 있는데 그것은 가족이나 친구와 같은 근본적이고 정서적인 관계들이다. 우리의 삶의 근간을 이루는 관계는 우리가 성장하고 삶을 이어나가는 데에 터전이 되는 만큼, 어떠한 시의성을 갖지 않을뿐더러 그 관계 속 구성원을 배제한 의사결정을 일방적으로 내리지 않는다. 만일 가족이 나에게 이 관계에서 나가라고 한다면, 친구가 나에게 더 이상 나를 좋아하지 않는 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 아무리 그들이 정중하게 요청을 한다해도 그 정중함으로 인해 그들의 요구가 더욱 잔인하고 폭력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을까? 일방의 이기적인 결정으로 인한 관계의 단절은 결국 그 일방의 이기심의 발로일뿐이며, 히라노 게이치로의 말처럼 그를 통해 맺고 있던 수 많은 다른 관계마저 말살해 버리는 총체적 인 인격의 살인행위에 버금갈 수 있다.           


2. 가장 가까운그래서 더욱 잔혹한 


아일랜드의 독립에 대한 견해 차이로 발발한 아일랜드 내전(1922-1923)이 아일랜드의 역사에 길이남은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된 것은, 전쟁의 양자가 가족이며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불과 얼마전까지 영국에 대항해 함께 싸워온 그들과 피를 흘리며 싸운 전쟁은 승자가 있으나 승자가 없는 전쟁이 되어 버렸다. 모두가 피를 흘렸고, 모두가 고통을 나누어 가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노아 바움백감독의 결혼 이야기(2019)에 등장하는 주인공 찰리와 니콜은 끝을 보지 않고서는 자신들의 싸움이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처절하고 철저하게 서로에게 맞선다. 한때 누구보다 치열하게 사랑했던 시간을 함께 보낸 그들은 누구보다 상대의 치부를 잘 알고 있었기에 고통은 배가되었고, 이 싸움으로 두 사람은 영원히 전과 같은 인생을 살 수 없게 되었다. 콜름의 절교 선언 전까지 마을 사람 모두가 아는 절친이었던 파우릭과 콜름의 싸움역시 서로를 잘 아는 만큼 서로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으며, 승자가 있으나 승자가 없었던 아일랜드 내전만큼이나 승자없는 허무한 싸움이 되고 말았다. 가장 잘 아는 사람과 싸움, 한때 좋아했던 사람과의 싸움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그 관계의 철저한 단절이라는 결과이외의 그 이상, 그 이하의 무엇도 얻어낼 수 없다. 처음 싸움을 시작할 때의 명분은 싸움의 도중에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싸움이 끝나면 승자도 패자도 막대한 대가를 치룬다. 어떠한 싸움도, 어떠한 전쟁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3. 멈춰진 총성여전한 전쟁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본토의 총성이 멈춘 것 같다는 콜름의 말에 파우릭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 분명히 싸움은 조만간 다시 일어날 것이다. 어떤 것들은 그 자리에서 멈춘 채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좋은 것 같다”. 파우릭의 말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     


콜름과의 싸움을 통해 파우릭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뛰어들게 된 싸움의 본질을 이해하게 되었다. 싸움의 원인을 이해하거나 납득하지 못한채 싸움을 시작해야 했던 파우릭이지만, 한바탕 콜름과의 싸움이 끝이 나고나니,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싸움의 원인이 해결되지 못한 채 싸움이 잠시 멈추었다면 언제든 잠시 멈춘 이 상태에서 다시 싸움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싸움이나 다툼이 분명한 명분을 내세운 상태로 발생했다면, 그 싸움은 그 명분을 관철시켜 문제를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이루어져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처럼 인간사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싸움과 다툼은 일방의 요구와 필요에 의해 시작되어 어쩔수 없이 다른 일방을 참전하게 만든다. 그렇게 싸움을 시작한 쪽의 요구가 관철되어 싸움이 멈춰서더라도 이번에는 억지로 싸움에 참여한 쪽의 새로운 요구가 생겨난다. 이렇게 인간이 벌이는 대부분의 싸움과 다툼은 새로운 요구를 끝없이 양산하고 있으며, 다만 그 요구의 필요와 강도에 의해 발발과 멈춰섬을 반복할 뿐이다. 그러니, 총성이 멈추었다고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 마음속에서 소용돌이 치는 이기적 전화가 꺼지지 않는 한 종전은 요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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