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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 에세이스트 J Aug 03. 2023

끝을 향한 여정, 존엄을 선택할 권리에 대하여

다 잘된 거야(Everything Went Fine), 2021

죽음이 흔하게 찾아오는 요즘이다.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부터, 꽃다운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까지. 우리의 일상에는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수 많은 죽음들의 마지막 숨결이 채워져 있다. 타인의 죽음을 대하면서 우리가 느끼는 일차적인 슬픔은 그들의 상실이 갖는 물리적 불가역성에 기인한다. 그러나 때로 어떤 이들에게 삶은 삶에 생긴 물리적 불가역성, 다시 말해 다시는 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삶이 곧 상실이 되기도 한다.  



프랑스의 대표적 감독 중 한 명인 프랑수와 오종은 그 동안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종종 죽음에 대해 다루어왔었다. 그러나 그간 다루어왔던 죽음이 영화의 주변부에 놓여 치명적인 개인의 욕망을 조명하기 위한 소품의 역할이었던 것에 비해, 이번 작품에 나오는 죽음은 영화의 중심이자 메시지이며 모두에게 던지는 심오한 질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 영화에는 유럽 예술영화의 황금기를 풍미했으나 이제는 어느덧 노인이 되어버린 앙드레 뒤솔리에, 샤를롯 램플링, 한나 쉬귤라와 중년이 지난 소피 마르소가 모두 출연하여 관객에게 커다란 반가움과 향수를 주는 동시에, 꽃 같던 그들의 나이든 모습을 접한 관객에게 그 어느 때보다 노화와 죽음의 문제에 대해 실제적 몰입의 기회를 제공한다.               


1.  삶의 한계, 정할 수 있는 문제인가?


어느 날 85세를 눈앞에 둔 아버지가 뇌졸증으로 쓰러진다. 이 소식에 두 딸은 병원으로 달려가고, 충격과 슬픔에 잠겨있는 두 딸에게 아버지는 끝낼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이미 얼굴에서부터 오른손, 두 다리에 이르기까지 마비가 온 아버지는 이렇게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절규한다. 이런 아버지에게 화도 내고 설득도 하려고 하지만 바지와 이불에 용변을 보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굴욕감에 울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서서히 마음이 바뀌어간다. 우리는 삶의 주체가 자신이어야 한다는 사실에는 당위적으로 동의하지만, 삶의 끝을 정할 수 있는 주체 또한 자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흔하게 배제한 채 살아간다. 내 삶의 한계를 스스로 정하고 싶을 때가 온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2016년 작 미 비포 유(Me Before You), 2020년 작 슈퍼노바(Supernova)에서도 이 영화에서 다루는 존엄사의 문제를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존엄사를 선택한 세 명은 모두 과거에 자신들이 삶이라고 여겼던 방식으로는 절대 살아갈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다. 아무것도 스스로 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 이들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담아 내지 못하게 된 육체에서 해방되기를 원했고 결국 가족의 동의와 도움으로 뜻을 관철한다. 


슈퍼노바 (2020), 미 비포유 (2015)

이들의 선택을 바라보며 우리가 말하는 삶이란 것이 갖춰야 할 기본조건이 있다면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떠오른다. 그 답이 무엇이든 가장 간단한 것조차 나의 의지대로 할 수 없고, 기본적인 욕망마저 사치로 비추어 지는 상황을 삶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정신과 육체의 부조화, 혹은 삶의 부조리를 스스로의 결정으로 중단하고 자 했던 이들의 선택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과 비판이 존재하겠지만 그럼에도 공감의 측면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들이 정상적 신체기능을 상실했다는 점과 아울러, 우리가 머무는 인간다움의 영역에 바로 얼마 전까지 그들도 머물렀었다는 동지애에서 발로한 것은 아닐까.   


2.  선택의 필연적 양면성


이 영화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자신이 뇌졸증으로 정상적인 신체기능을 상실하자, 자신의 딸에게 다짜고짜 끝내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는데 조금의 어려움이나 망설임이 없다. 특히나 이 부탁을 들어줘야 하는 큰딸은 어린 시절 내내 아버지가 자신에게 내뱉은 배려 없는 말들로 그를 죽이고 싶은 것이 소원이었을 만큼 증오했었고 중년이 넘은 지금도 아버지는 일종의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 살만큼 살았고 누릴 만큼 누리다가 병이 들어 완치 불가능하니 죽겠다고 결정하는 것은 당사자의 논리로는 무리 없는 결론일 수 있으나, 이는 자신을 중심에 두고 타인을 고려의 대상에서 배제한 채 내린 지극히 이기적인 결론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기적 결론을 여느 타인도 아닌 자식에게 아무런 미안함이나 망설임 없이 내미는 이기적 행위에 대해서 우리가 할 일은 비판뿐일까? 어쩌면 비판과 함께 이런 이기적 행동 속에 숨어있던 당사자가 의도치 않았던 뜻밖의 이타성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부모나 배우자가 불치병에 걸리거나 신체의 일부를 사용하지 못하게 된 경우 그들을 보살피느라 가족들이 치뤄 내야하는 비용은 모든 면에서 막대하다. 환자는 환자대로 본인의 고통과 함께 자신 때문에 고통받는 가족의 고통을 지켜봐야 하고, 가족은 가족대로 생명을 이어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버티는 환자에게 삶의 일부를 내어줘야 한다. 환자와 가족이 겪어내야 할 이러한 악순환적 고통의 고리를 끊어내는 것은 결국 환자의 사망뿐이어서 대부분의 우리는 그 순간의 도래까지 최선을 다하며 서로의 자리에서 묵묵히 버텨낸다. 


그러나 때로 등장하는 뜻하지 않은 반전이 일순간 고통의 고리를 끊어낼 때가 있다. 이 영화에서는 아버지의 이기적 캐릭터가 바로 반전의 열쇠였다. 고통에 대한 인내심이나, 딸들에 대한 배려심은 커녕 자신만을 생각하는 아버지는 빠르고 확고하게 자신의 선택을 마치고 단행함으로써 고통의 고리를 가차없이 한번에 끊어버린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의도치 않게 큰딸에게 트라우마를 직면하여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주었다. 아버지에게 부탁을 받는 순간, 오랜 세월 간신히 눌러 놓았던 아버지에게 가졌던 어린시절의 증오를 다시 꺼내게 되었고, 있던 자리가 아닌 아버지의 마지막 길에 놓아둠으로써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내리는 선택은 대부분 우리를 위한 것이나 선택의 결과는 필연적으로 양면성을 갖는다. 그러니 우리가 바랄 일은 나의 선택으로 타인이 너무 많은 해를 입지는 않는 것, 그 정도가 아닐까.  


 3. 죽음: 삶이 다다르는 최후의 삶의 영역 


사르트르는 삶을 탄생과 죽음 사이에 놓인 선택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을 다시 생각해 본다면 우리의 삶은 태어나면서 시작되어 죽으면서 끝이 나니 결국 탄생과 죽음까지 아우른 개념을 삶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아버지인 앙드레의 선택은 결국 삶의 여정, 그 최후의 순간에 대한 선택을 내리는 행위로 보여질 수 있다. 



카뮈는 저서 ‘시지프 신화’에서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라는 충격적인 말로 글을 연다. 카뮈에게 자살은 공허하고 부조리한 세계를 앞에 둔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제1의 방안이나, 삶의 법칙을 놓고 보면 올바른 해답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제2의 방안이 될 수 있는 희망은 어떠한가? 카뮈는 희망 역시 삶을 기만하는 행위로써 자살과 마찬가지로 삶을 이어 나가기 위한 올바른 해법이 아니라고 했다. 카뮈는 삶을 이어나가기 위한 제 3의 방안으로 반항과 자유, 열정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명철하고 치열하게 의식의 활동이 가능한 대부분의 우리에게는 유용한 삶의 법칙이 될 수도 있으나, 의식의 활동 그 자체가 불가능한 어떤 이들에게는 의미를 갖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니 이들이 내린 끝에 대한 선택은 도피를 위한 고독한 투쟁의 패배가 아니라, 여전히 삶의 영역 안에 머무르는 동안 가족의 품에서 내릴 수 있는 품위 있는 마무리가 될 수도 있지는 않을까. 삶의 주체로서 자신이 내린 삶에 대한 최후의 선택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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