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퐁
나로 말하자면, 낯선 공항에서 얼른 정신을 차리는 순서는 이렇다.
첫째, 약간의 돈을 환전한다. 둘째, 핸드폰에 현지 유심칩을 바꾸어 넣는다. 셋째, 밖으로 나가 심호흡을 한다. 그러고 나면 이 도시에서 여행자로 살아갈 자세가 확립된다. 나는 늘 이 과정을 거친 뒤 ‘아아, 이제 본격적인 여행 시작이다!’ 하며 안심하는 것이다.
하노이는 알아도 하이퐁은 처음이었다. 하이퐁이라니. 자꾸 ‘하이 퐁퐁퐁!’이라고 장난치고 싶어지는 이름이다. 실제로 발음해보면 괜스레 경쾌해진다. 베트남을 가기로 했을 때 나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쭉 훑는 여행을 마음먹었다. 사실 종주니 종단이니 하는 것들과는 인연이 없었다. 2011년 아들과 세계여행을 다닐 때 남아공에서 이집트까지 아프리카 종단을 시도했다가, 탄자니아에서 집어치우고 태국으로 빠진 경험 이후, 나는 ‘종’자가 들어가는 여행을 꾀하지 않았다. 대신 한 도시에 오래 머무는 여행을 즐긴다. 그런 면에서 베트남 여행은 이례적이다. 아주 오랜만에 ‘종’자 여행을 하고 싶어졌다. 여행자의 변심에는 이유가 있다? 없다!
하이퐁 깟비 국제공항에 내려 입국심사(라고 해봐야 그저 여권에 도장을 찍어주는 것)를 마치고 350달러를 환전했다. 예외적으로 많은 금액인 건 어차피 공항이나 시내나 환율 차이가 크지 않다는 정보를 입수해서다. 그리고 베트남 통신사의 심 카드를 핸드폰에 장착했다. 하이퐁은 호찌민, 하노이에 이어 베트남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라지만 공항은 소박했다. 아마 이름난 도시가 아니어서겠지. 덕분에 취항하는 항공사와 승객의 수가 적어서 여행자로서 자세가 확립되는 과정이 간편했다. 베트남 여행을 하노이가 아닌 하이퐁에서 시작한 것은 인근의 깟바 섬이 하롱베이와 가깝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롱베이에 버금가는 란하베이가 깟바 섬에 있고 깟바 섬에서는 하롱베이와 란하베이 모두를 손쉽게 가볼 수 있다. 애초에 소도시만 다닐 예정이었으니 굳이 하노이까지야.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바닷가 선착장에 내렸다. 여기에서 스피드 보트로 1시간을 가면 깟바 섬에 도착한다. 보트 티켓을 사고 나니 배를 타기까지 2시간의 여유가 생겼다. 점심을 먹고 커피나 한잔 마시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주위를 둘러봤을 때. 배낭을 메고 나처럼 두리번거리는 남자가 있었다. 척 봐도 한국인이다. 혼자였고 선한 인상이었다. 실은 하이퐁 공항에 내렸을 때부터 그를 보았다.
여행지에서 한국인이 한국인과 마주치면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난다. 반갑게 인사하거나 모른 척하거나. ‘한여름 휴가 기간에, 한국인이 많이 가는 도시나 유명 관광도시에서, 동행이 있다.’ 이 중 둘 이상이 겹친다면 모른 척하는 게 낫다. 눈치 없이 “어머, 한국인이세요?” 하고 말을 걸었다가는 “아, 눼에”라는 영혼 없는 대답과 함께 냉랭한 얼굴을 마주하기 십상이다.
첫 번째 반응을 보여도 무난한 경우가 바로 이런 때다. 즉 비수기에, 여행자가 많지 않은 도시에서, 혼자인 데다, 인상이 좋은 사람이, ‘무언가’를 찾고 있을 때. 가령 같이 밥을 먹을 ‘동행’을 찾는다거나 함께 커피를 마셔줄 ‘동행’을 찾는다거나 심심하지 않도록 대화를 나눌 ‘동행’을 찾는다거나. 나로서는 상황 파악 끝.
“한국인이시죠? 깟바 섬에 들어가세요?”
“네. 배 시간이 남아서 쌀국수나 먹을까 하고 둘러보던 참이에요.”
“잘 됐네요. 저도 그렇거든요. 같이 식사하실래요?”
“혼자보다야 둘이 먹는 게 낫죠!”
여행 첫날은 아무래도 긴장하기 마련이다. 하필 오전 7시 15분 비행기라 새벽부터 서둘러야 했다. 유럽 같은 장거리는 아니지만, 하이퐁까지 5시간 20분의 비행이 짧다고는 할 수 없었다. 선착장에 도착했을 때 나에게는 약간의 휴식과 안심이 필요했다. 그런 점에서 같이 밥을 먹을 수 있는 데다 모국어가 통하는 동행을 만났다는 건, 꽤 괜찮은 상황이었다.
24인치 여행 가방을 끌면서 맛집을 찾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라 우리는 코앞에 있는 노점 식당으로 갔다. 주인아주머니는 영어를 몰랐고 두 명의 여행자는 베트남 말을 몰랐으므로 벽에 붙어 있는 음식 사진 중 하나를 가리켰다. 새우가 푸짐하게 들어가 군침이 도는 쌀국수였다. 명색이 항구도시인데 최소한 새우 정도는 먹어줘야 하지 않겠어? 국물이 빨간 게 맵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아주머니는 ‘Spicy’나 ‘Hot’을 전혀 못 알아들으니. 나는 일명 동남아시아의 ‘쥐똥고추’라면, 편으로 썰어놓은 것 두어 개만 국물에 살짝 넣었다가 바로 빼낼 정도로 매운맛에는 약한 편이다. 에라 모르겠다, 매우면 눈물 콧물 흘려가며 먹는 수밖에. 처음 보는 남자 앞이지만.
길가에 내놓은 낮은 테이블과 조그만 목욕탕 의자에 앉아서 (엄청 매울지도 모르는) 쌀국수를 기다리노라니 절로 웃음이 났다. 우리는 통성명을 하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여행자라면 흔히 할 법한 대화였다. 그동안 어떤 나라들을 여행했는지, 이번 여행에서는 어느 도시들을 갈 건지, 깟바섬에는 며칠이나 머물 건지, 선착장까지 택시비가 얼마나 나왔는지까지. 그래서 내가 3만 동이나 바가지 쓴 것도 쓸데없이 알아버렸다. 이윽고 나온 쌀국수는 조금도 맵지 않았다. 눈물 콧물을 보(이)지 않아도 되었으니, 그에게도 나에게도 다행이었다. 쌀국수에는 새우와 고기, 채소가 가득 들었고 국물은 담백했다. 우리는 게눈 감추듯 싹싹 비웠다.
이후 순서는? 당연히 산책이지. 먹었으면 걸어야 한다, 여행자라면 걸어야 한다는 데에 두 사람은 동의했다. 거리에서 머리를 깎는 세상 심각한 표정의 이발사와 손님을 구경하고, 삼각형의 전통 모자 논을 쓰고 열대과일을 파는 여인들을 거쳐서, 먼지 날리는 공사장 옆을 지나갔다. 비록 작지 않은 가방을 끌고 울퉁불퉁한 길을 걷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이쯤에서 당기는 건 시원한 커피. 연유가 들어간 달달한 베트남 커피 말이다. 작은 로컬 카페에 들이닥친 외국인 손님들에게 직원은 약간 놀란 듯했다. 아이스커피를 시켰는데 뜨거운 커피핀(커피를 내리는 일인용 도구)과 얼음을 담은 유리컵이 따로 나왔다. 이번에는 손님 쪽에서 당황했다. 이거 아이스커피 맞나? 직원은 노련한 표정으로 돌아가 ‘커피핀의 커피가 다 내려지면 얼음 컵에 부으시오’라고 손짓으로 알려 주었다. 방금 만난 두 여행자에게 하이퐁에서의 첫 쌀국수와 첫 산책과 첫 커피는 만족스러웠다. 이 모든 것이 단 두 시간 동안의 일이다.
나는 언제나 이런 순간이 신기하기 짝이 없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 나처럼 길가 노점에서 쌀국수를 먹어도 맛있다고 고개를 끄덕일 때. 아무 카페에서나 커피를 마셔도 즐거워할 때. 경쟁하듯 여행지에서 저질렀던 실수들을 늘어놓아도 창피하지 않을 때. 이때 나는 이미 여행이라는 시공간에 깊숙이 들어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