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1.5의 존재감

by 소율


여행지이면서 여행지가 아닌 도시가 있다.

이곳에 발을 들이긴 하지만 둘러보거나 머물지는 않는다. 즉 존재감이 없는 곳, 아무 기대도 하지 않는 곳. 도시 1에서 도시 2로 이동하는 중 1.5 정도에 끼어있는 운명. 닌빈에서 다음 목적지인 동허이까지 기차로 8시간이 걸린다. 하루에 5시간 이상의 이동은 하지 않는 게 나만의 규칙이었다. 나는 지도에서 중간에 걸려있는 도시에 동그라미를 쳤다. 좋아, 여기서 잠깐 내렸다 간다. 닌빈에서 4시간이 걸리는 빈(Vinh)이었다.


빈에 대해서라면, 아는 것이 1도 없었다. 내 가이드북에도 나와 있지 않았고 베트남 여행 카페에서도 언급된 적이 없다. 분명한 건 관광도시가 아니라서 여행자들이 가지 않는 도시라는 거였다. 그렇다 한들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인데 하룻밤 거쳐 가는 게 뭐 어렵겠어. 어차피 다음 날 일찍 기차역으로 직행해야 했으니 잠만 자면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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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를 타고 기차역 근처에 있는 숙소에 내렸다. 저렴한 숙박비가 의심스러울 만큼 번듯한 호텔이라는 데에 놀랐다. 오, 로비만으로도 기대 이상인데. 노란색 아오자이 유니폼을 입은 아리따운 프런트 데스크 직원은 대한항공 승무원 같은 태도로 손님을 맞이했다. 속으로 한 번 더 놀랐다. 그녀는 정중하게 여권을 보여달라고 말했다. 나도 그에 못지않은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가방에서 여권을 꺼내려고 했다. 이 시점에서 내가 세 번째로 놀랄 줄이야.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여권이 없었다. 미소고 뭐고 얼빠진 표정으로 가방을 마구 뒤졌지만 끝내 여권은 나오지 않았다.


그때 번쩍 뒤통수를 후려치는 기억. 오늘 아침 닌빈의 숙소에서 여권을 돌려주지 않았다! 베트남은 별스럽게도 체크인을 한 후 숙소 측에서 여권을 가져가기도 한다. 그 자리에서 복사하거나 사진을 찍은 후 돌려주는 숙소도 있다. 가져가거나 돌려주거나 반반이다(반반치킨도 아닌 것이 말이야). 닌빈의 숙소는 전자였다. 물론 체크아웃할 때 다시 돌려주어야 한다. 유능하기로 소문난 그 매니저였다면 이런 실수를 하지 않았을 텐데. 마침 의욕은 넘치나 어리바리한 청년 직원이 체크아웃을 해 준 게 사달이었다. 그는 손님의 여권을 돌려주는 ‘막중한 임무’를 잊어버린 것이다.


교통사고처럼 잘잘못을 따지자면 숙소 측이 70, 손님 측이 30이라고 할까. 손님이 깜빡했어도 당연히 숙소 측에서 돌려주어야 했고(처음에 그들이 가져갔으니), 손님 역시 스스로 여권을 챙겼어야 했다(비록 숙소 측이 내어주지 않았어도). 어쨌거나 애초에, 헷갈리게 남의 여권은 왜 가져가냐고! 그동안 한 번도 여권을 잃어버린 적은 없었다. 그만큼 물건 챙기는 건 철저히 하는 편이다. 나는 평소처럼 마땅히 내가 가지고 있겠거니 믿은 모양이다. 베트남에서 여행자는 체크인을 하는 순간 당분간 여권이 수중에 없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자칫하다가는 여권을 찾으러 되돌아가야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닌빈으로 돌아갔을까?


허둥대는 나에게 노란 아오자이의 그녀는 차분하게 말했다, 여전히 단정하고도 우아한 미소를 유지하면서.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닌빈 호텔에 전화해서 손님의 여권을 이리로 보내달라고 하겠습니다.” 그녀는 하늘이 보내준 천사였다. 이 대목에서 내가 어찌 잇따라 놀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천사가 민첩하게 전화를 거는 모습을 나는 입을 벌리고 지켜보았다. 가만, 그런데 난 내일 아침 일찍 여기를 떠나야 하는데? 다음 도시인 동허이의 숙소와 기차 편까지 예약을 마친 상태였다. 내일 내가 떠나기 전까지 여권이 도착하기는 무리가 아닐까? 나는 다시 천사에게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럼 내일 가는 동허이의 숙소로 여권을 보내도록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여권이 갈 거라고 동허이 숙소에도 전화해 놓을게요.” 역시, 천사의 일 처리는 빈틈이 없었다.


짐을 들고 내 방으로 올라갈 때쯤에는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홀가분하게 방문을 열었는데,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멋들어진 전망이라니! 혼자 자기 아까울 정도로 널찍하고 푹신한 침대. 욕조가 달린 깨끗한 욕실. 방 크기도 운동장이네. 이거 진정 23달러짜리 방이 맞아? 나는 꺅꺅거리며 침대로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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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강렬한 유혹이 피어올랐다. 이 도시에 더 있고 싶다, 격렬하게 더 있고 싶다. 특별한 볼 것이 없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 빈 시내에 가보지도 않았지만, 미리 반해 버렸다. 생각 같아서는 여기서 며칠 더 지내고 여권도 확실하게 받아 가고 싶었다. 그러자니 동허이의 숙소와 기차표가 걸린다. 이후 다른 도시의 일정도 마찬가지로 꼬일 테고. ‘질러버려 파’ ‘정신 차려 파’ 사이에서 나는 갈팡질팡했다. 이름밖에 모르고 온 나에게 빈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나 보다. 몇 번이나 놀라게 하는 것과 동시에 고민까지 안겨 주다니. 빈 씨, 나를 아주 들었다 놨다 하는군요. 나는 빈이 선사한 모든 것이 황송했다. 오기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한 따뜻함을 느꼈다. 이제 빈은 그 어떤 도시보다 선명한 존재감을 드러내었다. 예기치 않은 '행운의 도시’로서. 여권은 그리 걱정되지도 않았다. 깜짝 선물 같은 빈이라는 도시를 믿었고 때때로 천사가 되는 베트남 사람들을 믿었으니까.


아 궁금할까 봐 밝히자면, 의외로 나는 ‘정신 차려 파’를 선택했다. 깔끔하게 다음날 동허이행 기차에 올라탔거든. 그런 예감이 들더라고. 어떤 걸 선택해도 문제없을 거라는. 빈에 머물렀어도, 일정대로 동허이에 가는 것도 모두 괜찮을 거라는. 한편 그건 어떤 쪽을 선택해도 아쉬움이 남았을 거라는 뜻이기도 했다. 동허이로 가는 건 빈에서 건질 수 있었던 미지의 경험을 놓치는 일이었고, 빈에 남았다면 동허이 일정이 틀어져 곤란을 겪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냥 나는 이 여행을 무작정 믿었다고나 할까. 아 진짜 솔직해지자면, 결국 귀차니즘의 승리라고나 할까. 숙소 예약과 기차표를 바꾸는 게 엄청나게, 매우, 상당히 귀찮았거든. 크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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