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고 비효율적인 여행자

닌빈

by 소율


이쯤에서, 그가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벌써 두 번이나 투어를 연기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 단지 상황이 그랬다. 나의 여행 속도는 느렸고 체력은 금방 바닥나곤 했으니까. 그의 입장에서 나는 아주 느리고 비효율적인, 그다지 반갑지 않은 손님이었을까.

DSC00397.JPG


닌빈 시내의 작은 호텔(이라기보다는 게스트하우스)은, 예약사이트의 후기에 따르면 매니저가 유능하고 친절하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낮 12시쯤에 도착했는데, 나를 맞이한 건 소문난 매니저가 아니라 어수룩한 청년이었다. 그는 이런저런 관광지를 소개하며 투어를 권했다. 땀꼭, 짱안 외에도 닌빈에는 유적지, 동굴, 사원 등 생각보다 알찬 볼거리가 많았다. 닌빈으로 말하자면 아직까지는 하노이의 일일 투어 관광지로만 알려졌다. 하물며 4일을 예약한 나는 온갖 투어를 전부 들이대도 될 만큼 시간이 많아 보였겠지. 투어라야 목적지까지 왕복할 쎄옴(오토바이) 기사를 연결해 주는 것이다. 어차피 오토바이 운전은 내 능력 밖의 일이라 기사가 필요하긴 했다. 문제는 그들이 정해놓은 루트가 온종일 진행된다는 점이었지만.


나는 오전에 어딘가를 열심히 다녀오면 오후에는 ‘어이구, 수고했네’라며 쉬어야 한다. 원래도 저질 체력이었지만 해가 갈수록 심해졌다. 본래부터 계획에 맞춰 용의주도하게 움직이는 편은 아니었다. 네팔 여행에서도 그랬다. 아들과 나는 포카라에서만 19일을 눌러있었다. 남들 다 하는 히말라야 트래킹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사람들은 ‘너희들이 과연 사람이냐 나무늘보냐?’ 하는 표정이 된다. 다들 19일 동안 포카라에서 ‘도대체, 뭘, 했냐’고 물어본다. 아 우리가 무얼 했냐면, 아침 늦게까지 침대에 달라붙어 있다가 길거리 손수레에서 파는 뜨거운 찌아(네팔식 밀크티)가 생각나면 쪼르르 뛰어나갔던가. 페와호수 옆으로 둘러 난 길을 하릴없이 날마다 어슬렁거렸던가. 그러다 내키면 노 젓는 나룻배를 빌려 탔던가. 햇빛과 바람이 번갈아 드나들던 한적한 카페에서 오후 내내 글을 썼던가. 혹은 우리가 찍은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들여다보았던가. 나무늘보치고는 많은 것을 한 것 같기도 하고 욕심내는 여행자로서는 별것을 안 한 것 같기도 했다. 애초에 나의 여행은 (짧은 시간에 많은 곳을 둘러보는) 효율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쯤에서 왜 내가 투어를 두 번이나 연기했는지 털어놓아야겠다. 닌빈에 오자마자 뜻밖의 의욕적인 직원에게 동화된 나머지, 나는 오후에 ‘잠깐’ 다녀올 곳이 있다면 가보겠다고 했다. 눈치 챘겠지만, 이건 평소의 나답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는 가까운 항무아를 추천했다. 점심 식사 후 시간에 맞추어 오토바이 기사가 데리러 오기로 했다.


한 가지 소소한 불편만 제외하면 무리 없는 시작인 것 같았다. 내가 예약한 4일 중 오늘 하루만 다른 방에서 자야 한다는 것 말이다. 그 정도야. 점심도 먹고 짐도 풀어놓고 나갈 준비가 끝났을 무렵. 누군가 예약을 취소해서 당장 내 방을 쓸 수 있단다. 항무아에 데려다줄 오토바이 기사가 오기 전에 방을 옮기기로 했다. 꺼내놓은 물건들을 급하게 가방에 쑤셔 넣고 있는데, 뭔가 이상했다. 달러와 신용카드가 들어있는 지갑이 보이지 않…는다?


싸던 짐을 다시 풀어 샅샅이 뒤졌다. 이게 왜 없을까? 처음 짐을 풀었을 때 어디에다 두었더라? 아까 잠깐 문을 열어놓고 저쪽 방에 다녀왔는데 설마 그 사이에 누가? 지갑을 찾기 전에는 방을 떠날 수가 없었다. 오토바이 기사는 도착했는데 나는 아직 짐조차 옮기지 못했고 지갑은 여전히 못 찾은 상태. 이럴 수가, 총체적 난국이었다. 문득 나의 장점인지 단점인지 모를 습관이 떠올랐다. 지나치게 물건을 잘 보관한 나머지 어디에다 두었는지 찾지를 못하는 것. 어쩌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지갑을 어딘가에 잘 넣어두었을 것이다, 아마도. 급히 방을 옮겨야 하는 상황에서 그 어딘가를 깜빡 잊었을 것이다, 아마도. 옷을 넣어둔 수납 팩을 열어 옷을 한 장 한 장 다시 꺼냈다. 티셔츠와 바지 사이에 얌전하게도 지갑이 들어가 있었다. 아까 두 번이나 뒤져볼 때는 나타나지 않더니만……. 지갑 분실(?) 사건은 어이없이 해결되었다. 하지만 나가기도 전에 진이 빠져버린 나는 항무아 일정을 내일로 연기했다.


DSC00394.JPG


다음날 오전에 가볍게 항무아만 다녀오고 싶었는데 이번에는 유능한 매니저가 오전에 짱안, 오후에 항무아를 가는 일정을 내밀었다. 어제 일방적으로 투어를 취소한 게 미안해서 더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짱안 투어에서 유쾌한 스페인 남자들을 만났지 뭔가.


짱안 투어만으로도 하루치 에너지는 죄다 써 버렸다. 게다가 새로 사귄 스페인 친구들이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하는데 거절할 내가 아니다. 이제 항무아는 뒷전이었다. 만약 항무아가 사람이었다면 “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들과 함께 보낼 시간에 들떠있었다. 거듭 미안하지만, 항무아를 다음날로 또 연기(해야만) 할 수밖에.


유능한 것 외에 친절하기로도 소문난 매니저는 화를 내지 않았다. 고마운 일이다. 그는 아마 닌빈의 관광지를 하나라도 더 보려고 애쓰는 여행자들을 많이 겪었을 것이다. 그래서 최소한의 시간에 최대한의 만족을 줄 루트를 고민했을 터.


실은 처음부터 말을 했다. 나는 ‘하루에 한 가지만’ 하겠다고. 그러자 그는 의아하다는 얼굴로 알려 주었다. 그렇게 하면 ‘비용이 더’ 든다고. 나는 다시 말했다. 적은 비용으로 많은 곳을 가기보다는 ‘느리게 조금만’ 보아도 괜찮다고. 그가 권하는 빠르고도 효율적인 여행이 나에게는 오히려 비효율적인 여행이 될 확률이 높았다. 어차피 여행지에서 모든 것을 다 해볼 수도 먹어볼 수도 없다. 모든 여행자는 필연적으로 어떤 것들만 선택해야 하고 어떤 것들은 포기해야 한다. 선택했으면 전적으로 믿어야 하고 포기했으면 미련 없이 놓아야 한다. 나는 선택과 포기 사이의 엄정한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저질’ 체력 혹은 ‘환자’ 체력을 오가는 내 신체 상태에 걸맞은 느린 산책을 즐긴다. 관광지에 발자국을 남기는 것은 뒷전이고 맛집과 쇼핑에도 관심이 없다. 그런 면에서 나는 욕심 없는 여행자다. 우연히 만나 친구가 된 사람들과 웃고 이야기하는 시간을 놓칠 수 없다. 수줍은 동네 꼬마들이 다가오면 풍선을 불어줘야 한다. 오전에 이 도시의 멋진 곳에 다녀왔다면 오후에는 길모퉁이 카페에 앉아 노트를 펴야 한다. 딴 건 몰라도 시장의 노점 쌀국수는 꼭 맛봐야 한다. 경험상 그런 곳이 나에게는 최고의 맛집이므로. 그런 면에서 나는 욕심 많은 여행자다. 나에게 효율적인 방식이란 욕심 없음과 욕심 많음의 경계를 자유롭게 오가는 것이다. 그건 내가 현명해서라기보다는 그런 여행이 내게 딱 맞는 옷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가끔은 유능하고 친절한 직원들에게 홀려 다른 선택을 하기도 하지만. 그런 뒤에는 속으로 ‘역시!’ 이마를 치며 제자리로 돌아오곤 하지만.

keyword
이전 07화대도시가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