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매일만보

어쩌다 다이어트

by 소율

나의 걷기는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이전에는 내키는 대로 걸었다. 매일 걸었던 시절도 있었지만 보통 삼사일에 한 번씩, 거리는 3, 4km가량. 두세 달 꾸준히 하다가 일 년 내 멈추기도 했다. 한마디로 들쭉날쭉. 코로나 이후에는 정확히 '하루에 만 보'라는 목표를 세우고 걸었다. 걷기의 세계로 들어가면 만 보와 그 이상이 존재한다. 일례로 만 보와 만 오천 보가 있다. 만 보가 옳은가, 만 오천 보가 옳은가? 눈치챘겠지만 정말 우문이 아닐 수 없도다. 그래도 물어보시면 대답해 드리는 게 인지상정. 현답을 찾아볼까나?


사실 몇 보가 적절한지는 사람마다 다르지 않겠는가. 개인별로 체력, 기분, 상황이 제각각인데 모두에게 적용되는 정답이 있을 리 없다. 걷기 에세이 <걷는 사람, 하정우>에서 그는 매일 3만 보를 걷는다고 한다. 게다가 가끔은 10만 보라니! 가히 걷기계의 프로님이시다. 말하자면 하 프로는 황새, 우리는 뱁새. 범인들의 세계에서는 만 보를 기준으로 삼는다. 나같이 다리가 짧고 걸음이 느린 뱁새가 보통 걸음으로 만 보를 걸으면 대략 6km, 약 1시간 30분이 걸린다. 직장인이라도 조금 신경 쓰면 충분히 가능하므로 힘을 내봅시다, 우리 뱁새 님들.


그런데 ‘만 보’의 유래가 궁금하다. 왜 하필 만 보인가? 결론부터 밝히자면 미안하지만, 일본 업계의 상술이라는 것이다.


「일본에서 1964년 도쿄 올림픽이 끝난 뒤 건강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자 이에 편승해 이익을 보려는 업체가 ‘만보계’라는 걸음 계측기를 만든 게 시원이라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만보계에서 1만을 뜻하는 ‘만(万)’자가 사람이 걷는 모습과 흡사해 판매촉진 차원에서 만 보 걷기를 홍보했을 뿐 특별한 과학적 의미는 없다고 지적했다. ...... 미국 뉴욕타임스는 걷기의 건강증진 효과를 분석한 기존 연구를 인용해 실제 최적점은 1만 보보다 훨씬 적은 수준에서 형성된다고 설명했다....... 하버드대 버건 대학원의 2019년 논문에 따르면 건강증진 추세는 7천 500보에서 정점을 찍었다.」 - 2021년 7월 8일 연합뉴스 기사에서 발췌.


아니 만 보를 걸으라더니 웬 맥주 김빠지는 소리냐고? 꼭 만 보일 필요는 없단다. 그런데도 굳이 만 보를 선택하는 이유는 대단하지 않다. 그냥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숫자니까! 히히히. 7천 5백 보가 정점이라고 한들 만 보를 걸어 나쁠 건 없지 않냐 말이다.


2020년 3월부터 나는 매일 만 보를 걸었다. 다이어트 효과는 딱히 기대하지 않았...나? 목표는 예전처럼 걷는 습관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정말 체중에 1도 변화가 없으니 살짝 심통이 올라오더라고. 어쩐지 오기도 나고 욕심도 생겼다, 기왕 시간 내어 걷는 김에 체중을 줄여야겠다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 아니 딱 초과분 5kg만 빼야겠다고 결심했다. 한 달 만에 전격 목표를 수정했다.


4월부터 걸음 수를 만 오천 보로 늘렸다. 만 오천 보는 약 9km, 내 걸음으로 2시간 20분 정도가 걸렸다. 즉 만 오천 보는 만 보와는 또 다른 세계였다. 내 멋대로 걷기가 난이도 ‘하’였다면 만 보가 난이도 ‘중’, 만 오천 보는 난이도 ‘상’에 속했다. 특히 시간을 확보하는 게 관건이다. 바쁜 사람은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일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코로나로 인해 연구소는 개점휴업 상태. 매일 출근은 하지만 넘치는 게 시간이었다. 아마 코로나 와중이었기에 가능한 목표였던 것 같다. 걷기에 마음을 쏟고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면 분명 간장에 절인 게장처럼 ‘코로나 블루’에서 헤어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시간과 더불어 필요한 건 절실한 동기. 평범한 성인이 매일 만 오천 보를 걷는 일은 단순히 의지만으로 달성하기 어렵다. 나에겐 5kg을 감량하겠다는 결심이 강력한 동기가 되어 주었다. 만 오천 보를 시작함과 동시에 다이어트 공부를 병행했다. 복잡한 건 모르겠고 하나만 뇌리에 박혔다. ‘탄수화물을 줄인다!’ 즉 밥을 평소의 절반만 먹었다. 빵이나 과자 등도 덜 먹으려 노력했다.


정리를 하자면 2020년 3월에 시작해서 2021년 9월까지 19개월째 만 보 이상 걷고 있다. 그중 만 오천 보는 6개월, 만 보는 13개월. 걷기를 한 지 10개월 만에 목표 백 퍼센트 달성, 오예! 이후 9개월 동안 요요 없이 유지 중, 오예! 10년 만에 예전의 나를 되찾았다. 처음 아들과 동남아시아 3개국 배낭여행을 했던 2007년, 그때 입었던 반바지가 엉덩이에 쑥 들어간다. 추억이 서려 있는 데다 새것처럼 멀쩡해서 버리질 못했다. 솔직히 다시 입을 거라곤 눈곱만큼도 기대하지 않았는데. 아 돌아온 반바지여. 돌아온 내 몸이여. 돌아온 걷기 생활이여. 감격시대가 아닐 수 없었다. 코로나와 함께한 1년 프로젝트가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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