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을 계획했다. 해외에서 살아 보기로 결정했다. 돈을 벌면서 체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고 온 우주의 기를 모아 찾아냈다. 비행기 티켓을 끊고 비자를 받았다. 난생처음 편도 티켓을 들고 한국을 떠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민박집 언니’라는 새로운 직함을 달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은 3개월 동안 폭풍처럼 진행되었다.
'어떻게 여기서 민박집을 하게 되셨어요?'. 혈혈단신으로 머나먼 타국에서 여행자 뒷바라지를 하고 있는 모습을 호기심 가득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머릿속에 물음표가 떴다. ‘그러니까… 음…’ 많고 많은 나라 중에 왜 스페인 남부의 세비야에 살게 되었을까? 같은 질문이 반복될수록 ‘명분’은 매번 디벨롭되었고 결국 ‘운명론’이라는 스토리텔링을 완성하게 되었다.
따뜻한 남쪽나라에 귀인이 있다더라
20대부터 신년이 되거나 뭔가 일이 풀리지 않으면 심심풀이로 사주를 봤다. 일명 통계학으로 불리는 사주 풀이는 대부분 비슷했다. 역마살이 있다고 했다. 따뜻한 남쪽 나라에 가야 좋은 기운을 받을 수 있고 무엇보다 운명의 ‘님’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타고난 운명 덕일까 그렇게 필리핀,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등 따듯한 남쪽나라를 부지런히 나다녔었다. 허나 술술 잘 풀리는 인생이 되지 못했고 님도 보지 못했다. 후에 생각해 보니 점지된 진정한 따뜻한 남쪽 나라는 다른 곳에 있었던 듯하다. 그러니까 아프리카와 제일 가까운 유럽의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세비야 같은 곳 말이다.
한 장의 사진에 홀려 결정한 첫 유럽여행
2012년, 32살에 첫 유럽여행을 떠났다. 대부분 런던-파리 루트를 추천해 주었다. 하지만 늦게 떠나는 유럽여행인 만큼 나만의 여행지를 찾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은 사진으로 먼저 여행지를 만나는 것. '유럽여행’을 입력하니 엄청난 양의 사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드르륵드르륵 가열차게 마우스 휠을 내리던 손가락이 멈췄다. 깎아지른 아찔한 협곡 사이를 연결하고 있는, 비현실적으로 웅장한 다리와 마주했다. 어디서도 보지 못한 이국적이고 경이로운 풍경에 마음을 빼앗겼다. 사진을 보는 순간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저곳으로 가야겠다’라고 결심했다. 그렇게 한 장의 사진이 스페인으로 이끌었다.
여행의 인연이 구원의 빛으로
친구와 20일간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혼자가 되어 포르투에 도착했다. 친구와 헤어지고 얼마간은 자유를 만끽했던 것 같다. 무엇을 하든지 오롯이 내 마음에 따르는 시간들이 좋았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열흘 동안 단 한 명의 한국인을 만나지 못했다.
예전 같으면 얼씨구나 좋다 했을 상황인데 연인 혹은 가족과 여행 온 외국인들 사이에 있어서 일까. 영어가 짧은 탓일까. 무채색 감성이 돋아나는 리스본의 분위기에 휩쓸린 것일까. 쓸쓸함이 묻어나는 푸른색 아줄레주 때문일까. 외로웠다.
모국어 수다가 간절해 스페인 첫 도시인 세비야는 한인민박을 예약했다. 늦은 오후 같던 리스본을 떠나 만난 세비야는 한낮의 도시였다. 활기가 넘쳤고 형형색색의 아줄레주는 반짝였다. 무엇보다 오랜만에 한국어로 원 없이 수다를 떨었다. 당시 민박집 사장님이 몰래 밥도 한번 더 챙겨주고 투어도 시켜주고 각별히 신경을 써주어서 더 기억에 남는 도시가 되었다.
해외에서 게스트하우스를 해야겠다는 결심이 섰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세비야 사장님’이었다. 조언을 얻기 위해 쪽지를 보냈는데 마침 1호점 운영자가 필요하다고 했다. 무턱대고 차리지 말고 운영을 해보고 결정해보라는 제안을 했다. 초기 투자 자본 없이 수익을 얻을 수 있다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내민 손을 덥석 잡았다.
딱 1년 만에 다시 스페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첫 유럽여행은 영국-프랑스라는 공식을 따랐다면. 론다 사진을 만나지 못했다면. 포르투갈을 혼자 여행하지 않았다면. 모든 행동이 경험이 바통을 이어받으면 여기까지 오게 한 것 같다면 너무 과장된 것일까. 도망치듯 정착한 이곳이 운명이라고 믿고 싶었다. 어차피 스페인 세비야 그러니까 따뜻한 남쪽나라로 가게 돼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