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비야의 한여름은 40도를 우습게 넘긴다. 한국처럼 습하지 않고 건조해서 나름 견딜 만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 이야기다. 뚝뚝.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목으로 흘러내렸다.
2호점 알바가 도망갔다. 일주일간의 인수인계를 마치고 주인 언니가 2호점으로 넘어가면서 아르바이트생이 그만 두기로 했었다. ‘그동안 알바들이 왜 그렇게 그만뒀는지 알 것 같네요’ 의미심장한 쪽지 한 장을 남기고 내가 오자마자 그녀는 사라졌다.
그렇게 나는 하루 만에 이 넓은 집을 혼자 청소해야만 했다. ‘아!’ 이런 또 부딪혔다. 집 구조와 가구가 익숙지 않아 열의만 넘치는 몸뚱어리와 마찰이 심하다. 아무래도 멍이 들 것 같다.
청소야 노하우가 없어도 그저 시간을 들여 열심히 하면 되지만 당장 내일 아침밥이 걱정이었다. 한국에서 요리가 취미라며 주접을 떨었지만 생각해보면 대부분 파스타, 볶음밥 등 간단한 음식이었다. 머나먼 타지에서 한국의 향수를 달래 줄 만한 정통 한식을 만들어 본 적은 거의 없었고 10인분의 음식을 한꺼번에 해본 적은 더더군다나 없었다.
청소를 마치고 낮잠을 잤다. 시차 적응이 안돼서 해롱해롱 제정신이 아니었다. 세비야 이틀 만에 본능적 시에스타를 경험하게 되었다. 두 시간쯤 지나고 땀범벅이 되어서 깼다. 정신을 추스르니 내일 아침이 벌써 걱정되었다. 주인 언니는 처음 온 여행자들보다 더 많이 아는 ‘민박집 언니’ 콘셉트를 유지하길 바랬다. 물론 처음은 아니니 조금 더 알 수는 있겠지만 아무리 메서드 연기를 펼쳐도 아침 상에서 들통 날 것이 분명했다.
슈퍼로 가서 수박 한 통을 샀다. 수고스럽게 깍둑썰기를 해서 정성스럽게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더위를 피해 숙박객들이 하나 둘 숙소로 들어왔다. 에어컨을 켜주고 수박을 꺼내어 거실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고백했다. 인정에 호소했다.
여행은 언제나 사람을 여유롭고 풍요롭게 만드는 것 같다. 여행자인 그들은 곤란해하는 나를 다독였고 아무거나 잘 먹는다며 하얀 거짓말도 서슴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은 어땠냐고. 조금이라도 만회를 하기 위해 귀한 김치를 꺼내어 호기롭게 김치찌개에 도전지만 결과는 김치가 담긴 끓인 물 수준이었다.
아침을 만들고 치우고 청소를 하고 세탁기를 돌리고 또 뻗었다. 낮잠을 자고 거실로 나왔는데 테이블 위에 빵과 메모가 올려져 있었다. 내 처지를 이해해주고 내 편에 서서 다른 여행객들을 함께 이해시켰던 해인 양이었다. 체크아웃을 했는데 자느라 인사도 못하고 보내다니 너무 미안했다.
‘언니랑 민박집이랑 잘 어울려요. 언니는 꼭 잘 해낼 거예요. 힘내세요’
예정 없이 닥친 시련에 생각도 못한 위로. 계획대로 척척 진행되었다면 절대 만나지 못했을 진심이었다. 메모지 옆 봉투를 열어 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 그 날 인생에서 가장 달달한 애플파이를 맛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