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숙사형 고등학교에 다녔는데, 학교 옆에 근방에서 보기 힘든 깨끗하고 운치 있는 등산로가 있었다.
야간 자율학습시간이 되고 사감 선생님이 독서실을 한 번 돌고 나면, 가로본능 폰으로 문자를 주고받던 커플들은 짝을 지어 공원으로 나들이를 떠났다.
밤산책이 귀찮으셨던 사감 선생님은 언제나 내게 학생들을 잡아오도록 시켰다.
나는 패딩 지퍼를 턱밑까지 올려붙이고, 한 손에 손전등을 든 채 낙엽길을 떠돌았다.
그럴 때면 바람은 유난히 차게 느껴지고, 하늘은 잔인할 만큼 높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시청각 자료들로 예민해진 내 귀는 언제나 눈 보다 먼저 목표들을 찾아냈다.
"선배님. 들어가셔야 합니다."
나는 어두운 벤치를 향해 말한다.
"3분만 있다 와."
어둠 속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대답한다.
나는 다시 공원을 걸으며 풀잎냄새와 들꽃향기를 맡기도 하고, 관동별곡과 비타민 결핍증을 외우면서 인류 문명의 창대함에 나 홀로 감동하기도 했다.
모든 임무가 끝나고 나면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 뒤, 다음날 아침 메뉴에 이름을 올린 소시지 볶음의 맛을 상상하며 긴 긴 밤을 지새워야만 했다.
"선생님, 왜 저에게만 손전등을 들려주시나요?"
내가 묻는다.
"너는 3년 동안 밤산책 나갈 일이 없을 것 같으니, 바람이나 쐬게 해 주려고 그런다."
사감 선생님이 껄껄 웃으며 대답한다.
그 순간 내 가슴 한 구석에서는 뜨거운 불길이 일었다.
나는 성공을 갈구하는 한 마리 사냥개가 되었다.
문제집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며, 언젠가 공원의 음지를 차지하고 있는 쌍쌍바들의 자리를 내가 차지하고, 사감 선생님께 복수하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나는 아주 좋은 대학에 합격했다.
첫 학기가 시작하기도 전에, 나는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채, 늦은 밤, 독서실 앞에서 밀대로 골프 스윙 연습을 하고 있는 사감 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 저 이제 S 대 생입니다."
내가 말했다.
"넌 인마, 그 정도로는 택도 없어."
선생님이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바람이 차고, 하늘이 유난히 높아 보이던 겨울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