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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 작가 Jun 12. 2022

6월 12일 조영아의 하루

드라마의 마지막 회

영아는 어린 시절부터 드라마 보는 것을 좋아했다. 맞벌이를 하던 그녀의 부모님은 매일 퇴근을 하고 와서 밤 10시에 하는 드라마를 봤다. 부부 사이에 대화는 따로 없었다. 그들은 그저 드라마만 조용히 봤다. 드라마가 끝나고 나면 영아의 어머니는 잠을 자러 들어갔고 아버지는 뉴스를 보다가 소파에서 잠드는 경우가 많았다. 영아는 부모님이 오시면 자신과 함께 놀 것이라 기대했지만 부모님은 영아에게 따로 놀고 있으라는 말만 했다. 그래서 언제가 부터는 그녀 역시 조용히 부모님이 보는 TV를 함께 시청했다. 한 때 영아는  부모님이 TV 속에 나오는 배우를 자신보다 더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저 드라마가 무엇이길래, 하루를 마친 부모님이 자신보다 드라마를 더 챙기는 것일까? 영아의 어린 시절은 그런 의문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영아에게 드라마를 보는 시간은 무척 소중했다. 부모님과 거의 유일하게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성인이 된 영아는 여전히 드라마를 보는 것을 좋아했다. 밤 10시에 하는 드라마는 물론 다른 시간대의 드라마도 챙겨봤다. 영아는 가끔 부모님 댁에 가면 부모님과 드라마를 함께 시청했다. 노인이 된 부모님은 언젠가부터 영아와 대화를 많이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제 말이 없는 것은 영아 쪽이었다. 영아는 부모님이 질문을 하면 짧게 대답했고 드라마나 보자고 했다. 부모님은 괜히 드라마 내용을 묻는 척하면서 영아에게 말을 걸었지만 영아는 조용히 듣고 있다가 최소한의 대답만 했다. 영아 역시 부모님과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하고 싶었지만 그들과 대화하는 것이 어색했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상처와 습관 탓이었다.

영아는 조용히 혼자서 드라마를 보는 것을 좋아했다. 이제는 TV 드라마뿐만 아니라 각종 OTT에서 서비스하는 오리지널 드라마도 챙겨봤다. 드라마를 볼 때 그녀는 굉장히 몰입해서 봤다. 주인공의 사연에 공감할 때가 많았고 자신이 마치 드라마 속의 등장인물인 것처럼 감정 이입했다. 드라마 한 회가 끝나면 하루 종일 다음 내용이 어떻게 될까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친 적도 많았고 블로그나 유튜브 등 다른 사람들이 분석한 드라마 내용을 보는 것도 좋아했다.

드라마를 볼 때 영아에게 독특한 습관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드라마의 마지막 회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재미있는 드라마라도 끝까지 보는 경우는 드물었다. 10부작이든 16부작이든 20부작이든 50부작이든 어떤 경우에도 마지막 회는 보지 않았다. 다만 시즌제 드라마라면 다음 시즌을 위해 마지막 회를 보기는 했다. 

영아가 드라마의 마지막 회를 보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영아는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이 너무 싫었다. 마지막 장면과 스탭 롤이 올라오면 영아가 몇 개월 동안 몰입했던 드라마가 완전히 막을 내렸다. 그녀가 상상하던 세계가 붕괴되는 것이었고 그녀가 몰입했던 것들이 추억이 되는 순간이었다. 영아는 그런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또 다른 이유는 결말에 실망했기 때문이었다. 영아는 드라마에 몰입했기 때문에 결말이 자신이 원하는 데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를 많이 봤다. 영아는 그럴 때면 참을 수 없는 실망감을 느꼈다. 그래서 괜히 결말을 봐서 기분을 망치는 것보다 차라리 드라마를 끝까지 보지 않고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이 더 좋았다. 

마지막 이유는 영아의 개인적인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드라마가 완전히 막을 내리면 부모님은 잠시 동안 드라마를 보지 않았다. 드라마가 끝나면 그들은 일종의 휴식기와 탐색기를 가졌다. 드라마에 너무 몰입했기 때문에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고 다음에 볼 드라마를 찾았다. 그러나 부모님이 서로 마음에 맞는 드라마를 찾는 것은 꽤나 오래 걸렸다. 그래서 영아는 매일 밤 10시 부모님과 TV를 볼 수 있는 시간을 잃을 때가 많았다. 영아는 그래서 드라마의 마지막 회를 굉장히 싫어했다. 드라마가 끝나고 나면 부모님과 다시는 시간을 같이 못 보낼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시달렸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드라마의 마지막 회를 보면 그때의 생각이 떠올라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며칠 전 영아가 좋아하던 드라마가 끝났다. 이번에도 영아는 마지막 회를 보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들어간 포털에서 드라마의 마지막 회 내용을 뉴스로 보게 되었다. 역시나 영아가 생각했던 결말이 아니었다. 이미 블로그와 유튜브에서는 결말에 대한 혹평이 이어지고 있었다. 영아는 그것을 보고 괜히 이런 것들을 검색했다고 생각했다. 영아는 그런 것은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영아가 좋아하던 드라마가 끝나는 날이었다. 영아는 평소처럼 드라마의 마지막 회를 보지 않으려고 했다. 영아는 드라마의 마지막 회가 방영되는 시간에는 1회를 다시 보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 회에 다시 그녀는 처음으로 돌아가 드라마의 시작을 보는 것이 좋았다. 모든 드라마를 이렇게 보는 것은 아니었고 정말 좋았던 작품의 경우에는 그러하였다. 오늘 끝나는 드라마도 영아는 굉장히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늘 낮 영아의 어머니가 영아에게 집에서 같이 밥을 먹자고 제안했다. 영아는 내일 출근해야 해서 바쁘다고 거절했지만 어머니는 시골에 계시는 할머니가 반찬을 가져다주셨다며 꼭 먹고 가라고 했다. 결국 영아는 부모님과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다. 

그렇게 부모님 댁에 간 영아는 저녁만 먹고 가려고 했지만 어쩌다 보니 과일도 먹고 부모님과 드라마도 보게 되었다. 영아가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드라마의 마지막 회였다. 계속 집에 가겠다는 영아를 붙잡아둔 부모님의 고집 때문이었다. 영아는 부모님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단호하게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영아는 정말 오랜만에 드라마의 마지막 회를 보게 되었다. 영아는 핸드폰을 하며 애써 결말을 피하려고 했지만 그러기엔 드라마가 너무 재미있었다. 

마지막 회는 영아가 생각하기에 굉장히 훌륭했다. 영아가 원하는 결말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좋은 결론이었고 감동적인 장면이 많았다. 영아는 괜히 눈시울이 붉어졌다. 영아는 슬쩍 부모님의 얼굴을 봤다. 눈물 하나 없던 아버지도, 원래 눈물이 많던 어머니도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영아는 그런 부모님의 얼굴을 보니 더욱 울컥했다. 

드라마가 막을 내렸다. 영아는 TV를 끄고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 부모님께 말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영아의 손을 꼭 잡으면서 오랜만에 딸과 TV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고 했다. 그리고 갑자기 어린 시절에 영아를 잘 챙겨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하다고 했다. 영아는 자신의 아버지가 갑자기 안 하던 행동을 해서 어색했다. 그래서 영아는 아버지가 잡은 손을 빼면서 “아버지, 왜 그래요. 저 먼저 일어날게요. 어서 주무세요.”라며 일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영아는 집안의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드라마는 이미 끝났는데 어머니는 여전히 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아는 의아해서 “엄마, 왜 이리 울어? 무슨 일 있어?”라고 물었다. 그러자 이번엔 아버지가 한숨을 쉬며 무언가 말하려다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영아는 답답해하며 “뭔데, 별일 없으면 간다”라며 가방을 챙기고 현관문으로 향했다.


“영아야. 아빠가 얼마 전 건강검진을 다녀왔는데….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는구나. 미안하다 늦게 말해서.”


현관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은 영아는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말에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제야 영아는 부모님이 오늘 왜 그렇게 슬퍼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영아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너무 어이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영아는 슬픔도 분노도 아닌 처음 겪어보는 감정이 들었다. 영아는 현관에 가방을 내려놓고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영아는 아무래도 오늘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다시 묻고 싶은 생각도, 자세한 이야기를 물어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저 영아는 아버지를 봐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항상 젊을 줄 알았던 아버지가 아닌 노년의 아버지의 얼굴이 똑바로 보이기 시작했다. 영아는 그런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울기 시작했다. 


영아가 피하고 싶었던 드라마의 마지막 회가 방영하던 날, 영아는 가장 피하고 싶었던 소식을 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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