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곱단이 Feb 08. 2021

<라이프 오브 파이> - 주관적인 해석

주관적인 해석



필자는 파이가 사람들과 함께 표류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선택했다. 오랑우탄을 해치는 하이에나를 보는 장면에서 호랑이가 갑자기 숨어있다가 뛰쳐나오는 것을, 어머니를 해치는 주방장을 보고 숨어있던 자신의 '야성'이 나온 것으로 본다. 그래서 호랑이가 나온 순간부터 호랑이는 '파이의 야성(혹은 본능)'이고 소년은 '파이의 이성'이라고 생각했다. 파이는 홀로 남아 표류하면서 본능과 이성 중 어느 것을 따라 행동할 것인지 매 순간 선택해야만 했다. 초반에는 날뛰는 자신의 야성을 주체하지 못하고 배를 빼앗겼다. 배를 곧 파이의 '신체'로 본다면 온몸이 야성에 의해 지배 받고 있었고, 이성은 겨우겨우 배 끝을 묶은 가녀린 밧줄 하나에 의지한 채 위태롭게 출렁이고 있었던 것이다.



야성을 '리처드 파커'라고 호랑이에 빗대 이름을 짓고, 파이는 자신의 야성을 훈련시키려고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하지만 훈련의 기회는 어느 날 우연히 찾아왔다. 수많은 날치떼들이 굶주린 파이를 향해 느닷없이 날아오고, 이 중에서 한 마리 커다란 물고기가 파이를 향해 날아온다. 파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 물고기를 재빠르게 잡아챘다. 이 물고기 덕분에 주린 배도 채우고, 남은 물고기 조각을 '리처드 파커'에게 던지며 처음으로 자신의 야성을 길들이는 데에 성공하게 된다.


 이 장면이 필자는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이 부분에서 물고기가 헤엄치는 장면과 배 위로 날아오르는 장면까지의 시퀀스에서만 화면 위아래로 검은 띠가 생기면서 화면 비율이 변한다. 화면 비율이 변했다는 것은 연출자의 다양한 의도가 있지만, 감독이 이 장면을 관객들이 주목하길 바라는 메세지를 남긴 것이라고 생각한다. 흥미로운 점은 헤엄치는 물고기가 나오는 장면에서 프레임 안팎으로 물고기들이 마구 오고가는 것이다. 이 장면에 대한 해석은 다음 꼭지에서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다.

(p.s. 관심 있는 독자들은 1시간 15분 지점 즈음부터 영화를 다시 한 번 보면 이 장면의 차이를 알 수 있다.)



풍우를 만나면 신을 원망하고, 물고기를 만나면 신에게 감사하기도 하며 파이의 표류는 계속 되었다. 하지만 날이 가면 갈 수록 그의 이성도 야성도 굶주림 앞에서 기운을 차리지 못 하고 절망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그러던 중 한 무인도를 만나 잠시 머무르게 된다. 이 무인도는 섬 전체가 해초이고, 수많은 미어캣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채식주의자인 파이도, 육식주의자인 리처드 파커도 어렵지 않게 배를 잔뜩 채울 수 있었다. 또 어린 시절 좋아하던 수영을 할 수 있을만한 물 웅덩이도 있어, 파이는 잠시나마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이윽고 밤이 되어 잠을 청하려고 하자 섬은 낮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평화롭게 노닐던 미어캣들은 겁에 질린 듯 나무 위로 떼지어 올라왔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낮에 수영했던 물 웅덩이는 해골들이 떠다녔고, 연꽃 모양 열매 안에는 사람의 치아가 들어있었다. 파이는 이 무인도의 정체가 생물들을 녹여 먹고 사는 식충섬이라는 것을 알고 충격에 휩싸여, 이내 양식을 넉넉히 챙기고 이 섬을 떠난다.


 이 섬은 종교 그 자체를 말해준다. 순간순간의 선택에 따라 표류하다가 힘들고 지쳤을 때 만나 안식처가 되어주었지만, 낮과 밤이 엄연히 다르듯 빛과 어둠이 존재하는 종교 그 자체이다. 종교는 좋은 자양분이 되어주긴 하지만 이런 긍정적인 면만 쫓는 미어캣들과 같은 맹목적인 믿음을 가진 광신도들을 낳기도 한다. 맹목적인 믿음의 결과는 결국 자신의 인생을 무너지게 하는데, 그것이 바로 종교의 어둠이다. 이러한 면을 밤이 되었을 때 뼈 혹은 치아만 남고 스러져 버린 동물들을 통해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이 종교라는 섬에서 파이는 오로지 앞으로 자신의 삶에 필요한 만큼만의 자양분을 적절히 골라 떠난다. 마치 어린 시절의 파이가 온갖 종교들의 마음에 드는 부분들만 쏙 빼서 믿고 있던 것과 똑같다.



그렇게 표류를 계속 하다가 대륙에 다다랐을 때 파이는 일어설 기력조차 없을 정도로 몸이 쇠해 있었다. 이 와중에 리처드 파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글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마지막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떠나버린 리처드 파커를 향해 파이는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절규를 보낸다.


 이 부분은 표류하는 내내 자신의 삶의 의지였던 자신의 야성이 사라진 것이 슬프기도 하면서, 한 편으로는 예전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에 대한 기쁨이 아닐까 싶다. 자신의 야성을 길들이는 것에서 삶에 대한 의지를 찾으면서, 이전에는 몰랐던 자신의 또다른 자아에 대해 알 수 없는 책임감과 동질감 혹은 본능적인 경계심이 파이의 삶에 대한 의지의 불씨가 꺼지지 않게 도와줬기 때문이다. 다만 대륙에 닿으면서 그 동안 자신의 유일한 목적이었던 그것을 갑작스럽게 잃으면서 상실감이 컸기 때문에 이러한 장면이 나온 듯 하다.

작가의 이전글 <라이프 오브 파이> - 전개방식 / 믿음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