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

[부부 싸움 편지] 권태에 지지 않아~

by 써니B

누구에게나 찾아온다는 그 ‘권태기’가 나에게도 찾아왔어. 이상하게도 ‘권태’라는 말을 듣는 순간, 권태로워질 것 같은 주문에 걸려들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해. 그래서 가급적이면 ‘권태’라는 말을 내뱉지도 않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어. 그걸 인정하면 꼭 내 인생이 실패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불안해지기 시작하거든.


내 기억으로는 우리 둘 사이 첫 번째 권태기는 신혼여행 첫날밤이었어. 연애라는 합법적인 정신병을 겪고 나서 , 결혼이라는 콩깍지가 벗겨지기 시작한 현실의 첫날. 당신에게 들은 충격적인 한마디 말 때문이었어. 연애시절 열정적이고 뜨겁고 자상했던 ‘나만의 남자’는 온 데 간 데 없고, 결혼과 함께 이상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 대는 아저씨 한 명이 내 옆에 딱 버티고 있는데, 이 사람 같은 남자 맞나 싶을 정도였지.

“잡은 고기에 먹이 주는 것 봤어?”


신혼여행 첫날밤, 상상도 못 할 일이 벌어지고 말았어. 퉁명스럽게 내뱉은 당신의 충격적인 한 마디. 지금 생각해도 믿기지 않아. 이게 정녕 첫날밤 침대에서 내뱉을 수 있는 말인가? 몇 번 양보해서 생각해봐도, 이건 아니다. 설령 그런 마음이 들었다고 치자. 첫날밤 신부가 듣도록 그런 말을 하다니 , 이건 여자를 그림자 취급하거나 완전히 무시하는 거나 똑같아.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어.

여자에게는 첫날밤 판타지가 있어. 당신 나한테 질려버린 거야? 내가 매력이 그렇게 없어? 결혼할 때까지 아끼고 아껴서 정절을 지킬 걸 그랬나, 줄 듯 말 듯 애타게 만들고 연애 고수들이 하듯 밀당을 했어야 했나 별별 생각을 다 했어. 그래도 그렇지, 신혼여행 첫날밤에 이런 말을 들어야 하다니, 이건 너무 가혹한 출발이야.

돌아오는 제주 공항에서 울적해서 도망치고 싶었어. 연애시절, 당신은 모험가나 탐험가들이 가졌을만한 도전정신과 자신감으로 나를 흥분시켰어. 자상함과 배려가 넘쳤고, 나보다 네 살 어린 당신이 가진 책임감은 내가 배우고 싶을 만큼 감동이었어. 그런데, 신혼 첫날 마주한 당신은 긴 인생길을 함께 걸어야 할 동반자라고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꼰대’ 그 자체였어. 난 너무 굴욕적이어서 도망가고 싶고 꿈이라면 깨고 싶었어.


그날의 상처만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벌렁거려. 당신은 지금도 기억 안 난다며 또 꽁무니를 뺄지도 몰라. 하지만, 내가 몸과 마음으로 기억하고 있는 일을 당신이 모르는 일이라고 또 내뺀다면 난 두 번 상처 받게 돼. 제발 기억 안 난다고만 하지 말고, 그냥 꽁무니 빼고 도망치려 하지 말고, 기억을 떠올려봐. 그 시절 나한테 ‘권태’라는 단어는 청천벽력같이 엄청난 스트레스였어. 그걸 인정하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었어. 나한테 큰 상처가 당신한텐 아무 기억도 없는 일이라면 정말 더 암울해져.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제주공항. 내가 도망을 쳤다면 어땠을까? 우린 예쁜 두 딸들을 얻지 못했겠지. 아마 내 인생 곡선에서 지금의 선물 같은 아이들을 만나지 못했겠지. 그래도 나 도망치지 않고 이제껏 당신이랑 나름 잘 버티며 살고 있지 않아? 그때부터 내 뱃속에 있는 아이는 철부지였던 나를 더 강하게 만들어주는 존재였어.


이게 말로만 듣던 결혼의 현실이라면 빨리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된다고 스스로에게 다독였던 기억도 나. 처음엔 나 혼자만 겪는 문제라고, 어디 가서 창피해서 말도 못 하고 혼자 끙끙 앓았어. 내 남자가 변했어. 권태기가 이렇게 빨리 오다니, 신혼여행 가서 헤어지는 커플이 있다더니, 그게 내 이야기가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어.


그렇게 살다 살다가 두 번째 권태기가 찾아왔어. 둘째 낳고 한 3 년쯤 됐을 때야. 결혼 7년 차. 첫 번째 권태기가 너무 세고 강하게 흔적을 남겨서 그런지도 모르겠어. 난, 벌써 권태기를 막기 위한 방법을 짜내고 있었어. 결혼 7년 차, 가족이라는 소중한 시간들을 담아줄 달력을 만들면서 스스로 노력했어. 나와 당신 별명을 넣어 만든 우리 가족의 시간표를 보면서 서로에게 나태해지지 말자 다짐했었어. 하지만, 그렇게 이벤트도 공들여했는데, 우리 사이 권태를 비껴가지는 못했어.


어쩌면 지금도 권태기의 연장선일지도 몰라. 출산과 유산 이후 우린 성적 친밀감이 회복되지 못하고 있으니까. 다들 애들 키우고 사는데 부부 사랑이 뭐 그리 중요하냐고들 말들 해. 그런데 이렇게 권태기를 인정하는 순간에도, 내가 너무 하찮고 별 볼일 없고, 산다는 게 너무 지긋지긋해서 미치겠어. 아무 일 없다는 듯 밋밋하게 사는 게, 권태에 지고 있다는 게 너무 싫어.

본능적 끌림 그대로 당신한테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 그 강렬한 사랑의 떨림이 그리워. 생물적 본능의 욕구대로 몸과 마음을 주고받았던 그 시절이 가끔 사무치게 그리워질 때도 있어. 열정적인 사랑과 자신감, 도전정신, 폭발하던 그 성욕은 요즘 어디로 다 사라진 거야? 몸과 마음, 환경, 호르몬이 다 바뀌었다고 해도, 난 아직 그 순간 그대로 멈춰 있어. 그 강렬한 사랑의 기억 속으로 돌아가고 싶어.


우리 아직 한창때인데, 이렇게 무생물처럼 살고 싶진 않아. 함께 살아갈 날들이 너무 많잖아. 부부라는 세월을 사는 동안 세상 살아갈 힘을 당신에게 얻고 싶어. 그래도 잊지는 마~나 아직 당신한테 예쁨 받고 사랑받고 싶은 여자라는 거! 권태기도 씩씩하게 넘고 이혼 싸움도 다 겪고 지금 여기까지 잘 왔잖아.


권태 부부 교태 부부 될 때까지 잘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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