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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B Nov 22. 2018

일하는 엄마의 아침 풍경

[필사적 필사] 한강 '내 여자의 열매' 작가의 말

아침부터 산더미같이 쌓여있는 설거지 감 정리를 한다. 엄마 없는 시간동안 먹어치운 식생활의 흔적들이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아이들은 늘 배고프다고 하는데, 먹은 거 없이 이렇게 설거지만 쌓여갈 수 있는 건지 의아하다. 먹고 치우지 않아서, 그릇과 수저, 냄비, 후라이펜이 뒤엉켜 싱크대를 점령해버렸다.


목욕탕 문을 연다. 거무죽죽한 흰 양말들과 색깔 양말들이 한 대야에서 몸을 섞고 있다. 큰 딸 면 생리대가 찬물에 담궈져 있다. 면 생리대 써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지. 언제 저 생리대를 제 손으로 한번 빨아보려나 하면서 재빠르게 비누칠로 혈흔을 없앤다. 하긴, 나도 중학교때 생리팬티 한 번 빤 적이 없었지. 엄마한테 혼날까봐 따로 보관했다가 결국엔 쓰레기통으로 직행한 것들도 많았으니, 내가 딸에게 뭘 기대하겠나.


거실을 둘러본다. 다행히 남편이 이부자리 정리를 했다. 누웠던 이부자리를 정리해 한 켠에 김밥처럼 길게 2,3번 접어 흰 천으로 덮어주는데, 최근 생긴 좋은 버릇 중 하나라며 남편 스스로 뿌듯해 하고 있다. 이불개기와 장롱에 넣기는 내 어린 시절에도 아침을 여는 리추얼이었다. 군대에서 이불각을 잡던 아버지덕에 나도 이불을 잘 정리해야만 하루를 시작하는 느낌이 들곤 했다. 이런 좋은 습관을 남편에게 전수했다는 사실에 만족한다. 장롱으로 들어가지 않고 거실에 정리된 이부자리는 쿠션처럼 변신해 등을 기댈 수 있는 공간이 돼서 좋다.


딸 아이 방은 어떤가? ‘혹시나’가 ‘역시나’로 돌아서는 순간. 손은 재빠르게 움직여 자동으로 분리수거를 한다. 문제집과 문제 푼 이면지, 화장품과 렌즈, 안경통이 어수선하게 책상 한 켠에 늘어져 있다. 수면 잠옷, 뒤엉킨 옷가지와 벗어놓은 양말과 스타킹이 한 식구인 듯 굴러다니고 있다. 이 방은 1년에 한두 번 정도는 정리가 되니, 그냥 마음을 비우면 된다.


고양이 녀석들은 그 와중에도 자기만의 느릿느릿 졸린 표정으로 두 발을 내밀고 찜질하듯 엎어져 있다. 우리 집에서 가장 여유로운 녀석들. 바쁘게 움직이다 냉장고에 기대 멍때리고 있으면, 여지없이 여자고양이 레이가 와서 몸을 기대며 부비부비하고 아이컨택을 한다. 쓰담쓰담 해달라며 봉긋 솟은 엉덩이와 꼬리가 내 코를 간지럽힌다. 내가 데려온 녀석들이기에 밥도 간식도 화장실 청소도 거의 내 담당이다. 새끼 때 미모에 반해서 데려왔는데, 이제 등치가 산만해져서 가끔 자다가 내 곁에 여우목도리가 와 있나 싶게 흠칫흠칫 놀라기도 한다. 주방 한 켠에 놓아둔 고양이 전용 도자기 그릇에 사료와 물을 갈아준다.


식탁옆 벽에는 얼마전 이케아에서 사 온 액자가 텅 빈 채로 사진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고보니, 가족 사진 함께 찍은 지가 언제였더라 아득해진다. 빨리 가족 사진 골라서 끼워놓아야 할 텐데 못하고 있다. 스마트폰에 사진을 찍은 것들은 다 제각각 잠들어 있고, 정작 함께 볼 수 있는 사진 액자는 텅 비어 있으니, 이번 주에는 이것부터 빨리 채워넣어야겠다.


아침이 조금 여유로운 직장에 다닌 지 이제 4달째가 되어간다. 출근 시간이 늦다보니, 아이들과 남편의 아침준비를 조금 여유롭게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과 남편이 출근하고 없는 공간에서 뒤늦은 아침식사와 정리를 시작한다. 뒤치다꺼리 하듯 살림살이들을 주섬주섬 주워 제자리에 가져다 둔다. 비닐과 종이, 쓰레기, 살림살이들이 한 데 엉켜 있는 아이들 방부터 대충 정리해두고 냉장고에 엄마 없이 먹을 저녁거리와 반찬들을 보이도록 재정비해둔다.


이제야 나만의 시간, 혼자 있는 시간이다. 녹차 한잔을 따뜻하게 우려내서 마신다. 정신이 조금 든다. 내가 오후반 출근이 되면서 예전보다 식구들도 더 야행성이 되가는 듯 하다. 자연스럽게 나도 더 늦게 잠들고 아침이 늦어지는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 예전에 책쓰기 모닝콜 팀과 함께 맞았던 새벽기상의 고요함은 없다. 대신, 전쟁같이 지나간 아침 흔적들을 정리한 뒤 맞는 나만의 티타임, 나만의 글쓰기 타임이 시작되고 있다.


한강 작가의 단편 <내 여자의 열매>를 읽었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지만 아내가 베란다 화분의 식물이 되어 가는 장면이 나온다. 요즘 흠칫흠칫 놀라게 되는 소설들이 나에게 많이 걸어 들어온다. 이 책도 지난 번 해방촌 서점 <고요서사>에서 엎어온 책이다. 제목에 끌리고 맨 뒤 부분 작가의 말에 끌려서 집어 들었는다. 그래도 뭐 어떤가? 소설가  한강은 여릿여릿한 느낌이지만 처절한 아픔속에서도 오롯이 피어나는 식물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 다 읽지 못했다. 너무 시리도록 아픈 장면이 많다. 섬뜩하고 예리한 것에 찔린 것처럼 아프고 눈에 선하다. 


한강 소설집 <내 여자의 열매> 작가의 말을 따라 써본다. 작가 본연의 존재 느낌을 따라가 본다.


작가의 말
1
열여섯 살이었다. 토요일 수업이 끝난 뒤 운동장 가의 긴 의자에 혼자 앉아 있었다. 햇볕이 내리쬐는 봄날 오후였다. 날이 저물도록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나눈 운동장을 향해 눈을 뜨고 있었다. 가방을 멘 아이들이 멀리서 오다가다 차츰 인적이 드물어졌다. 문득 정신이 들어보면 한 시간,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곤 했다. 그때, 그 햇빛 아래에서 나는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2
스물네 살의 추석 밤이었다. 달을 보려고 혼자 대문에 나갔다. 처음 직장에 다니며, 잠을 네다섯 시간으로 줄이는 대신 도둑글을 쓰던 때였다. 소원을 빌어야지. 희끗한 달을 올려다 보면서 나는 뭔가 바랄 만한 것을 생각해 보려고 했다.
그냥, 이 마음을 잃지 않게만.
그리고는 더 빌 것이 없었다.
순간순간 차고 깨끗한 물처럼 정수리부터 적셔오던 충일, ‘그것’과 바로 잇닿아 있다는 선명한 확신. 이제는 글을 쓸 때 간혹, 일상 속에서는 아주 가끔 만날 뿐인 그 마음이, 그때에는 눈을 뜨면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밥을 먹을 때나 걸을 때나 사람을 만날 때나, 그 마음은 그 자리에 있었다.
3
등단한 지 올해로 칠 년째에 접어든다.
한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그의 세포들은 끊임없이 죽고 새로 만들어지는 일을 되풀이한다. 그렇게 체세포가 모두 바뀌는 데 칠 년의 주기가 걸린다고 들었다. 칠 년 동안, 내 세포들이 새것이 되었다. 내 눈과 귀와 코와 입술, 내장과 살갗과 근육 들이 소리 없이 몸을 바꾸었다.
4
오 년 만에 두 번째 소설집을 묶는다. 첫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은 구십삼년 시월부터 구십사년 시월까지, 모두 만 일 년 동안 휘몰아치듯 씌어진 것들이었다. 그에 비하면 이 책은 긴 시간에 걸쳐져 있는 셈이다.
처음에는 시간의 순서대로, 다음에는 그것과 무관하게 작품들을 배열하며 읽어 내려갔다. 워낙 띄엄띄엄 한 편씩 쓴 것들이라, 이 시기에 이런 식으로 한두 편쯤 더 써놓았더라면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도 느꼈다. 다만 머무르지는 않았다는 것으로 부끄러운 위안을 삼아보았다. 나라는 고정된 존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물과 같이 변화하는 과정이 바로 나라는 평범한 진리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5
그랬다. 어리석게도 나는 이 책이 이대로 내 이력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내가 쓴 ‘내’ 책이라고. 하지만 그 ‘나’라는 게 뭘까. 운동장 가에 날이 저물도록 앉아 있었던 아이, 대문 앞에 엉거주춤 서서 달을 올려다봤던 스물네 살 난 여자애는 누구였을까. 이 한 편 한 편의 소설들을 썼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한 번쯤, 그녀들을 다시 만나보고 싶다.
6
나는 때로 다쳤다. 집착했고 욕망해고 스스로를 미워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부끄러움을 배웠고, 점점 낮아졌고 작아졌고, 그래서 그 가난한 마음으로 삶을 조금씩 더 이해하게 되었던 것 같다. 오래, 깊숙이 들여다보려 애썼던 것 같다.
그러는 동안 글쓰기는 나에게 존재하는 방식이었다. 숨 쉴 통로였다. 때로 기적처럼, 때로는 태연한 걸음걸이로 내 귀를 끌고 갔다. 나무들과 햇빛과 공기, 어둠과 불 켜진 창들, 죽어간 것들과 살아 꿈틀거리는 것들 속에서 모든 것이 생생했다. 그보다 더 생생할 수 없었다.
7
곁에 있어준 따뜻한 이들에게 고맙다.
이천년 이른 봄
韓 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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