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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여유 Apr 26. 2024

역세권을 능가하는 곳

“엄마, 역세권이 뭔지 알아?”

요즘 학교에서 사회를 배우는 아이가 묻는다. 우리 집이 역세권은 아니지만 다른 세권이라고 맞춰보라 했다. 엄마가 좋아하고 자주 가는 곳이야. 했더니 카세권이냐고 묻는다. 그게 뭔데?

“카페 자주 가잖아.”

아이들은 참 많은 걸 알고 있다. 거기 말고 엄마가 자주 가는 곳 또 있지. 사랑이랑도 손잡고 걸어가기도 하고 차 타고 조금 떨어져 있는 곳도 가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외친다.

"아~ 알겠다!! 도세권!"

가는 길도 참 예쁘다!

“여기서 횡단보도 안 건너고 도서관까지 길이 이어져 있어요.”  

친구 하나 없는 낯선 동네로 이사 오게 되었지만 도서관이 가까이 있다는 말에 마음이 놓였다. 도서관에는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이 많이 상주하고 있다. 소설, 에세이, 육아책, 교육서, 자기 계발서. 책욕심이 많은 사람에게 도서관은 최고의 쇼핑센터이고 핫한 맛집이자 분위기 좋은 카페다. 기분에 따라 자리도 골라 앉을 수 있다. 가장 자주 가는 곳은 총류 00번대와 문학 800번대 사이 큰 소파가 여럿 있는 너른 공간이다. 도서관에 가면 발걸음이 저절로 소설, 에세이 코너로 향한다. 여기부터 저기까지 모두 주세요, 플렉스 하는 부자가 된 기분으로 책을 잔뜩 골라서 큰 소파 중 하나를 골라 앉는다. 육아서와 살림책이 모여있는 500번대 서가 옆에는 3개가 하나로 쌍을 이루는 의자들이 있다. 미니멀 정리법 책을 하나 골라 보며 살림만랩 주부가 됐다가 초등아이 심리를 알려주는 책을 하나 또 가져와 현명하고 다정한 엄마로 분한다. 철학 서적이 있는 100번대로 가면 옆쪽 창으로 나무가 보인다. 하루종일 사람의 왕래가 적은 고요한 자리다. 초록이 가득한 창과 책을 번갈아 보면 사색이 절로 된다.  




문헌정보실에 들어가며 도서관 어플을 연다. 관심도서목록에 가서 50개씩 보이도록 설정을 바꾸고 담아둔 도서를 살펴본다. 대출불가였던 책이 대출가능으로 바뀐 것을 발견하면 썸남에게 그린라이트를 받은 듯 신나고 설렌다. 누가 가져갈 새라 발걸음이 빨라진다. 청구기호를 하나하나 살피며 찾아갈 때는 맥도널드 앞에서 소개팅 상대를 만날 때 같은 긴장감이 있다. 자리에 없으면 어쩌나 두근댄다. 다행히 자리에 있는 책을 손에 들고 편안한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자만추, 책과의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해 본다. 우연히 좋아하는 작가의 생소한 책을 발견하면 보물이라도 찾은 기분이다. 흥미로운 제목이 눈길을 끌기도 한다. 책등으로만 어필이 가능한 서가에서는 제목이 큰 역할을 한다. 화려한 표지들이 눈에 먼저 들어오는 서점에서 책을 고를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하루 새로 발간되는 책이 140여 권이 이른다고 하니 그중에 내가 아는 책이 얼마나 될까. 지나쳐버린 수많은 보석을 마주할 생각에 도서관에 가면 신이 날 수밖에 없다. 도서관에서는 책뿐만 아니라 사람도 마주친다. 필기하며 독서에 열중인 중년여성, 구석 자리에서 눈을 감고 계신 고단해 보이시는 할아버지, 어떤 책 읽는지 궁금한 책 고르는 중학생, 교육책이 모여있는 서가에서 마주친 같은 학년 어머니, 무슨 일인지 대출데스크에서 언성이 높이려는 아저씨, 핫북 코너에 자주 있는 운동복 차림의 여성. 책을 좋아하는 비슷한 취향의 사람들 같지만 제각각 다른 모습에 보는 재미가 있는 곳이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책구경, 사람구경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도서관 나들이다.

나름 명당인 서가 사이에 자리잡고 책읽기

타인이 이해되지 않고 나 자신이 이해되지 않을 때는 나에게 도서관을 처방한다. 각계의 전문가가 다양한 입장과 시선으로 세상만사를 알려준다. 사방이 꽉 막혀 책이 가득하고 형광등이 잔뜩 켜져 있는 도서관에 들어서면 순간 시간이 느껴지지 않는다. 터널에 들어온 것처럼 바깥과 단절된 다른 곳으로 이동한 기분이다.  바깥에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었더라도 책을 찾으러 온 것에 정신이 집중된다. 책의 청구기호를 찾고 바코드에 회원증을 찍으며 슬픔도 화남도 잠시 숨기다 보면 슬쩍 잊히기도 한다. 하릴없이 이 쪽 저쪽으로 돌아다니면서 눈높이 밖에 있는 책들을 살핀다. 사람들에게 잊힌 책들에 관심 가져본다. 조용히, 가만히 꽂혀있는 책들 중 어떤 것이 내 마음에 들어올는지 눈으로 좇아본다. 나를 기다린 걸까 싶은 책을 꺼내고 그 자리에 내 감정을 두고 와본다. 쫓아오면 할 수 없지만.    


오늘도 도서관에 간다. 도서관에서 책을 찾고 고르고 읽고 빌리러 간다. 도서관이 있는 일상이라 좋다. 외롭고 심심할 새에 도서관을 끼워 넣는다. 도세권에 살기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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