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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여유 Dec 20. 2023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 살림

소분되어 있는 절단대파 사오지, 왜 또...


며칠 째 부엌바닥에서 대파, 쌀 포대와 대치중이다.

'나 언제 정리할 건데?' '너 언제까지 거기 있을 건데?' 어제는 쌀포대에서 쌀을 퍼서 밥을 했다. 대파도 냉장고에 조금 있지 않았다면 비닐째 윗부분을 잘라 썼을지도 모른다. 인터넷에서 봤던 수많은 살림고수들은 장 보고 와서 바로 대파를 적당한 크기로 소분하고, 심지어 흰 부분, 초록 부분 나누어 잘게 썰어서 냉장고와 냉동고에 넣어놓던데. 간단한 소분조차 난 왜 이리 힘에 부치는가. 귀찮다는 마음이 우선인데, 그렇다고 저 자리에 내내 놓고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니 해야 할 일이다. 이러니 이미 파를 꺼내 써는 시작부터가 글렀다. 그래, 손질대파 안 산 게 어디니! 온라인에서는 눈으로 가늠이 잘 안 되어 손질대파 잘 사는데, 마트에 직접 가면 손질대파와 아닌 것이 비교가 한눈에 되니 쉽게 손이 안 간다. 아니면 남편이랑 같이 장 봐서 살림고수, 알뜰주부인 척이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우리 집에는 뿌리에 흙 묻은 저 녀석이 와있다. 일전에는 어디서 본 건 있어서 파뿌리를 잘라 야무지게 씻어 냉동해 둔 적도 있었는데, 아직도 우리 집 냉동고에 조용히 잠들어 계신다.


미니멀리스트, 살림고수들처럼 깔끔한 집안에서 즐겁게 살림을 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살림이 재밌다는 분들을 보며 '살림좋아 DNA'를 이식할 수 없을까 생각했다.

자주 가는 곳이 아니라면 안 가본 길로 그곳에 도착하고 싶고, 같은 길보다는 이왕이면 새로운 버스를 타고 목적지에 가는 것이 좋다. 이런 성향을 가진 자에게 살림은 반복의 연속이다. 밥을 먹고 치우고 다시 밥을 준비한다. 같은 메뉴가 아닌 것이 천만다행일까. 효율적으로 일하는 것을 선호하는데, 내가 생각하는 효율은 시간 대비 최대의 성과를 내는 것이다. 단순 반복하는 기계적인 일도 처리 속도가 빨라지거나 처리 양이 늘어난다면 좋다. 밥을 차리는 일도 365일 삼시 세 끼가 같은 메뉴라면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 1주일만 되어도 그 메뉴 만들기는 달인이 되어 있지 않겠는가. 살림은 곳곳이 비효율 천지다. 열심히 해도 성과 따윈 찾아보기가 어렵다. 치우고 치워도 티가 나지 않는다. 열심히 닦아 윤을 내도 금방 더러워지고 먼지가 쌓인다. 이러니 자꾸 안 할 궁리만 하고 안 하면 더러워지니 하기가 또 싫어지고. 그야말로 악순환의 연속이다. 아, 어쩌란 말인가. 한 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정리안 된 것을 일단 치워놓자 싶어 베란다에 쌓아둔 적이 있다. 소독하시는 분이 오셔서 "어머, 이사 오신 지 얼마 안 되셨나 봐요." 하시기에 이건 아니다 싶어 쌓였던 것을 치웠다. 이사 온 지 3년째였기 때문이다.






늘 하기 싫던 살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디선가 살림에 관한 문구를 보고 난 이후였다.

'살림은 살리는 일입니다.'

살림은 집을 살리고, 가족을 살리고, 나를 살리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머리에 뭘 얻어맞은 듯 띵한 느낌이 들었다. 대체 왜 이렇게 반복적인데 비효율적인 한 일을 왜 해야 하는지 몰랐는데 이렇게 중요한 일을 하고 있었구나. 살림을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결심도 섰다.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사명감에 불타 살림영상을 엄청나게 찾아보다 자연스레 미니멀에도 관심이 생겨 책도 여러 권 읽었다. 미니멀의 매력에 푹 빠졌다. 그 결과! 나는 미니멀리스트가 되었다! 면 참 좋았겠지만 그건 SF책에서 본 먼 미래의 환상 같은 일이다. 미니멀리스트가 되지는 않았지만 미니멀리스트에 대한 열망만은 마음 한 구석에 잘 모셔져 있다. 열심히 치웠다가 다시 어질러지고 정리용품을 샀다가 남은 정리용품이 정리가 안 되는 일을 반복한다. 서랍을 뒤집었다가 시간이 없어 도로 쑤셔 넣는 일이 허다하지만 아주아주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그리고 그 동력은 '살림은 살리는 일'이라는 나만의 소명.

외출 전 15분 치우기, 시간과 요일 정해 구역별로 치우기, 타이머 맞춰놓고 집안일하기, 사용한 후 바로 정리하기, 매일 하나씩 필요 없는 물건 버리기 등등. 좋다는 여러 방법을 시도하고 유명한 원칙 중 나만의 원칙을 골라본다. 의욕이 앞섰다가 도로아미타불이 되기가 일쑤이지만 내게 적합한 살림 방법을 찾아보려 노력 중이다. 언제쯤 딱 맞는 방법을 찾을지는 미정이라 아직 10년째 살림 새내기다.  

드디어 쌀은 정리를 했다. 이제 파, 네 차례야.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랬다. 아니지, 꺾여도 계속하는 마음! 그렇게 계속하다 보면 할머니 즈음엔 살림고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박막례 할머니처럼 70살에 살림유튜브를 시작하는 것이다. ‘다정할매의 오래된 살림이야기'. 생각해 보니 조금 설렌다. 유튜브 한다는 것 말고 살림을 잘하게 될 거라는 희망에.

“할머니는 언제부터 살림을 이렇게 잘하셨어요?”

“살림을 잘한 지는 3년쯤 됐어요. 꺾이고 꺾여도 계속해서 30년쯤 했더니 잘해지데요?”


오늘 아침도 어김없이 정신없는 아침이었다. 출근하는 남편에게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안겨주었다. 아침을 차리고 아이가 등교를 했다. '남편도 살리고 아이도 살렸네!' 문이 닫히고 조용해진 집안에서 뿌듯함을 챙겨본다. 쌀정리는 해서 개운한데 아직도 부엌 한켠에서 파가 날 응시 중이다. 약속 시간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파소분은 다음을 기약하고 짧은 집정리를 시작한다. 어제는 야반도주한 것 아닌가 싶은 집꼴을 보며 현관문을 닫았지만 오늘은 아니다. 하다 보니 시간이 촉박해진다. 아몰랑, 일단 여기까지만 하자. 나름 깔끔해졌다. 다녀와서 마저 하면 되지. 그래도 어제보다는 낫네!

언젠가 이런 부엌이 되기를 꿈꿔본다.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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