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8주째 글자 쓰기 연습을 하고 있다. 매일매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 2회 인증을 해야 하기에 적어도 주 2회는 쓰고 있다. 무언가 이렇게 꾸준히 할 수 있는 이유는 인증 신청을 했고 나의 얕은 책임감이 그것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역시 손들고 뭐든 신청해야 한다. 다짜고짜 손든 나를 칭찬해 본다.
처음에는 선긋기부터 시작해서 ㄱ,ㄴ,ㄷ 따라 쓰기를 했다. 아이가 왜 글씨연습책을 싫어했는지 직접 해보고 나서야 깨닫는다. 이렇게 지루할 수가 없다. 글자를 쓸 줄 모르는 아랍어였다면 따라 쓰기가 덜 지루했을지 모른다. 아는 글자를 기초부터 하나씩 쓰려니 몸이 베베 꼬인다. 이런 과정이 없다면 아무리 연습해도 원래의 글씨가 나오겠지 스스로를 달래 가며 열심히 따라 써본다. 같은 글자를 반복해서 쓰는 과정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니 이걸 언제 다 쓰나 싶었던 급한 마음이 스르륵 가라앉기 시작한다. 최근에 이런 시간이 내게 있었던가 싶어 가만히 짚어본다. 뭐든 정신없이 해치우고 하루 일과의 체크리스트에 완료표시를 하나 더 늘이는데 혈안이 되어 그다음, 그다음을 계속 외쳤던 것 같다. 그러고는 자기 전에 누워서 하루가 또 정신없이 지나갔구나 허망해했다. 해야 할 일들은 각설이처럼 죽지도 않고 또 와서 매일 새로 쌓여갔다. 짬짬이 연습해도 됐을 텐데 왠지 시간을 통으로 빼서 글씨연습하고 싶다고 욕심을 내고 핑계를 대며 시간을 따로 내지 않았다. 겨우 인증을 위해 필요한 만큼 글씨연습을 했다. 지금 돌아보니 해야 할 일 말고 하고 싶은 일에 시간을 내어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이상한 것은 인증을 위해 연필을, 펜을 들면서도 마음은 쫓기기보다 편안해졌다는 것이다. 고요하게 글자를 따라 쓰며 다른 생각들을 하지 않았고 더 잘 써보고 싶은 마음에 획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되었다. 인증을 할수록 글자 쓰기에 푹 빠지게 되었다. 연필이 사각거리며 지나간 자리에 글자가 남는다. 한글을 배우고 쓴 지가 어언 몇 년인데 한 획을 그을 때마다 견본글자를 곁눈질하며 글자를 쓴다. 눈으로는 글자를 따라 쓰는데 마음은 나를 따라간다. 새로운 서체가 익숙해질수록 내 마음에 마음 쓰는 것도 자연스러워진다. 아, 오롯한 혼자만의 시간이라서 글씨연습하는 시간 좋아했구나.
대학교 때 학생수첩은 스케줄 적는 용도로 쓰였다. 미리 일주일치 약속을 잡아뒀다. 점심 약속이 있고 저녁 약속도 있었다. 지금은 일주일에 하루 약속이 있을까 말까다. 더 이상 체력이 안되나 보다 슬퍼했었는데 글씨를 쓰다가 불현듯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는 나에게 혼자 있을 시간이 충분했던 것이 아닐까. 아이가 학원 가 있는 동안 나 혼자 드라마를 보고 가족들이 모두 잠든 늦은 밤 나 혼자 SNS를 하는데도 왜 이렇게 자꾸자꾸 혼자만의 시간을 찾았을까에 대한 해답. 그건 내가 원한 혼자만의 시간이 아니었다. 혼자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원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어쩐지 아이가 학원가는 시간이 늘었는데도 마음이 헛헛해서 아직도 시간이 부족한 줄 알았다. 얼마나 더 시간이 필요한 거니 스스로 자책하면서 하루종일 시간이 주어져도 계속 혼자 있고 싶은 것은 아닐지 두려웠다. 혹시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이 맞지 않는 성격은 아닐까, 죄 없는 가족까지 부정할 뻔했다. 마흔이 되어서야, 그것도 어쩌다 글씨연습하는 인증을 하다가 처음으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다니. 심지어 글씨연습 인증하는 과정을 이렇게 글로 쓰지 않았다면 끝끝내 몰랐을 것이다. ‘글씨 쓰는 것이 참 좋구나, 종종 써야겠다.’ 하고는 또 돌아서서 드라마를 보고 인터넷을 하다가 물리적으로 혼자 있는 시간을 내내 갈구하면서 끝날 뻔했다. 다행이다, 글씨연습 하게 되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