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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여유 Feb 28. 2024

알타리김치에 담긴 사랑

"김치 왔니?"

"나 지금 밖인데 오늘 하루종일 바쁘네. 아까 잠깐 집에 들렀을 때는 안 왔던데. 아침에 오늘 배달 온다고 문자 왔으니까 오겠죠 뭐."


아침부터 분주했다. 요즘 아이 치과에 가서 교정 상담을 받는 중인데 오늘은 결정하리라 마음을 먹고 갔다. 언제나 그렇듯 예상과 다르게 새로운 변수가 생겨서 다시 한번 고민해 보기로 했다. 뭐든 시원시원하게 결정했던 나였는데 아이 일에 고민이 많아지는지, 성격이 변한 건지 알 수가 없다. 머릿속에서 처리하라고 여기저기서 깜빡이는 불을 하나라도 끄고 싶었는데 실패했다. 치과가 아이가 좋아하는 회전초밥집 근처라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시간을 보니 학원에 갈 시간이라 피곤하다는 아이 말은 못 들은 척 가방만 바꿔 들고 바로 나왔다. 학원이 연달아 있었는데 아이가 학원 가있는 동안 점심 먹을 때 주차해 놨던 아울렛에 다시 갔다. 시간이 없는 와중에 지나가다 본 옷을 급하게 입어보지도 않고 샀더니 사이즈가 안 맞는다. 숨 돌릴 틈 없이 돌아다니다 김치는 까먹은 지 오래였다. 아이를 다시 만나 간식을 먹이고 다음 학원으로 보내고 기다리던 커피숍에서 아이친구 엄마를 만났다. 한참 수다를 떨다 보니 아이한테 끝났다고 전화가 왔다. 집에 오니 저녁 시간이다. 배가 고프다고 성화라 급하게 밥을 차려주다 보니 그제야 김치 생각이 났다. '알타리김치라고 했는데, 맛있겠다. 왜 안 오지? 오늘은 택배가 좀 늦네?' 보통 저녁 전에는 배달이 됐던 것 같지만 워낙 택배 물량이 많아 늦어지는 일이 종종 있어 기다려 보기로 한다.


하루 종일 길바닥에 있으며 조금씩 쌓였던 피로가  몰려온다. 이런저런 할 일은 아직 산더미 같고 설거지는 개수대에 쌓여있고 거실은 난장판인데 이제 아이와 공부하기로 한 시간이다. 공부를 조금 봐주다가 집안을 치우다 김치는 또 잊혔다. 아이가 잘 시간이 되니 어제 읽어주기로 한 책이야기를 꺼낸다. 어제 시간이 너무 늦었다고 건너뛰고 대신 내일 두 챕터를 읽어주겠다고 했던 걸 상기시켜 준다. "띠띠띠띠" 회식이 있다던 남편이 들어온다. 생각보다 일찍 들어왔고 생각보다 취해 들어왔다. 남편 좀 챙겨주었더니 시간이 지체되었지만 아이와 한 약속을 지켜야지. 책을 펼쳤다.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김치 아직이니? 기사님께 전화 한 번 해봐라. 밖에서 김치가 쉬고 있지는 않겠지?"

"전화해 볼게요. 날이 추워서 쉬지는 않을 것 같아요."

기사님과 통화가 되지 않아 문자를 보냈다. 문자 보냈다고 말씀드렸더니 이번에는 식품이라고 말씀드려 보라 하신다. 그제야 엄마가 오후부터 지금까지 내내 김치걱정을 하셨구나 깨닫는다. 지난번에 보내주신 김치가 어쩐 일인지 너무 물러버린 채 와서 잘 먹지 못하고 있다니 다시 보내주신 김치였다. 이번에도 또 그럴까 봐 걱정이 되셨는데 딸이 바쁘다니 채근도 못하고 기다리셨던 모양이다. 에고, 못난 딸은 그것도 모르고 아직 안 왔다, 왜 안 오는지 모르겠지만 곧 오지 않겠냐 태평한 소리만 늘어놨다. 아이한테 한참 책을 읽어주다 보니 드디어 배달완료 문자가 왔다.

"엄마, 조금만 천천히 읽어주세요." 김치를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져 나도 모르게 속사포랩을 하며 책을 읽고 있었다. 김치가 왔다고 말하니 기다릴 테니 어서 정리하고 오라고 한다. 얼마 전이었다면 김치에게 책 읽는 시간을 양보하지 않았을 텐데 그 한마디에 아이가 많이 컸음을 느낀다. 현관문을 여니 묵직한 스티로폼 상자에 막혀 문이 열리다 만다. 상자를 들고 와서 뜯어보는데 테이프가 잘 안 뜯어진다. 위아래 옆까지 꼼꼼하게 감아놓은 것을 보니 아빠 솜씨다. '아유, 아빠는 이거 한 번만 붙여도 된다니까 왜 이리 많이 감아놓으셨어. 떼는 게 일이야 아주.' 칭칭 감긴 테이프를 떼고 스티로폼 뚜껑을 여니 김치냄새가 봉인해제 된다. 밥을 이미 먹고 곧 잘 시간인데도 쌀밥이 당기는 냄새다. 김치통에 부랴부랴 넣으며 참지 못하고 하나 꺼내 깨문다. 아삭 소리에 기분까지 좋아진다. 알타리김치가 맛이 좋다. 김치 정리하는데 손이 시려오는 걸 보니 김치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김치를 다 꺼내고 난 바닥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울컥 나온다. 좁은 스티로품 상자에 빽빽하게 종류별로 아이스팩이 많이도 들었다. 김치 하나 보내는데도 딸이 다 익은 김치 먹을까 봐 노심초사 집에 있는 아이스팩이란 팩은 다 넣고 오는 동안 혹여나 택배가 험하게 다뤄질까 테이프를 열심히 감아놓은 아빠 사랑이 이제야 보인다. 테이프 떼며 툴툴거린 내 마음이 밉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묻게 하지 말고 내가 먼저 김치가 어디쯤 왔나 알아볼걸 죄송하다. 부모가 되어봐야 부모 마음을 안다던데, 난 아직 열 살 아이 엄마라 그 때의 부모마음 밖에 모른다. 그렇게 부모마음 한 걸음씩 밖에 못 안다고 생각하니 갈 길이 태산처럼 느껴진다. 아이가 고학년 된다고 선행 고민해야 할 게 아니고 부모님 마음 좇아가보려면 나야말로 선행진도 좀 쭉쭉 빼야겠다.

엄마께 김치 잘 왔다고, 하나 먹어보니 너무 맛있다고 문자를 드린다. 엄마의 걱정을 덜어드리고 나니 아이에게 책 읽어주는 목소리에도 여유가 붙는다. 떨어져 사는 부모님께 받은 사랑을 꼭 붙어 있는 아이에게 전한다. 내일은 아침부터 흰 밥에 알타리김치를 잔뜩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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