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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Dec 13. 2021

스페인에도 새벽을 여는 누군가가 있다

스페인은 그저 놀고먹는 줄로만 알았다. 유럽에서 스페인에 대한 인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밤늦도록 먹고, 마시고, 올레! 박수 쳐가며 춤추고, 흥을 돋우고, 그렇게 삶에 대한 열정이 넘쳐나는 나라.


하지만 여행에서 삶으로 거쳐 가면 살짝 얘기는 달라진다. 이들도 일한다. 그것도 나름 열심히, 그리고 다른 EU 회원국에 비해 오랜 시간 일한다. 워낙에 OECD 국가 중에서도 근로시간 최상위권에 있는 한국인의 기준으로 볼 때 성에 안 찬다 뿐이지. 이들도 똑같이 24시간을 살아가며 오늘을 충실히 채워간다.


마드리드에서 미팅이 있는 날이면 외곽도시에 사는 나로서는 6시부터 나가야 한다. 현장에 도착해서 잠깐 아침을 챙겨 먹을지언정, 집에서 먹고 나가면 이곳도 학생들과 직장인들로 붐비는 열차를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유럽의 써머타임은 10월 마지막 주 일요일에 끝난다. 그때부터는 아침 8시가 되어도 어둑어둑하며, 저녁 해는 5시 반만 되어도 떨어진다. 코끝에서 느껴지는 새벽 공기 감촉 또한 달라진다. 우리나라만큼은 아니지만, 겨울이 우기철이다 보니 고온 건조했던 여름과 다르게 습기가 바람에 실려 타고 올 때면, 뼛속까지 시리다는 게 어떤 건지를 실감한다.


으스스한 무채색 새벽 거리와 다르게, 인적 없는 거리에서 홀로 또각 거리는 구두 소리는 경쾌하다. 마스크 속으로 스며오는 찬기운은 신선함마저 더한다.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이 배경음악으로 나오는 것 마냥 어깨가 절로 펴진다. 왜소한 체구지만 오버코트로 가려지고 여유 있게 나가는 발걸음은 기분도 적당히 고취시켜 준다. 


이런 한적한 촌동네에 누가 새벽을 열을까. 자신감에서 자만감은 한 끗 차이다. 그 찰나 생각도 못한 형광등 불빛이 눈을 부시게 한다. 신문, 잡지, 껌, 물, 장난감, 교통카드 충전 등 온갖 잡동사니를 파는 작은 가판대.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번갈아 일을 보시는 곳으로 수시로 들려 교통카드를 충전하곤 한다. 




나는 이제 출근길인데 아저씨는 이미 불을 밝히고 물건을 정리하는 중이다. 누런 테이프가 아직 붙어 있는 박스가 층층이 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오전 내내 작업하실 게 분명하지만, 부부는 이미 작업에 들어갔다.


밖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내부에서는 재고 확인부터 시작해, 받아야 할 물건의 연락책을 뒤적거리고, 잔돈을 맞춰가며, 주변을 살펴볼 것이다. 그러다 옆집 추로스 가게가 문을 열면 아내든 남편이든 누군가 가서 진한 초콜릿 한 잔과 함께 갓 튀겨낸 추로스 한 접시를 주문하겠지. 핫쵸코에 듬뿍 찍어 바삭거리는 추로스를 먹으며 동시에 꼰 레체(con leche=밀크 커피)를 털어 넣듯 넘겨가며 손님을 맞이하며 오늘도 변함없는 일상을 받아들일 것이다.


10년 차 이방인의 눈으로 어느샌가 모든 게 익숙해져서 스페인 사람들은 으레 모든 일에 늦다고 여겨 왔는데. 새벽부터 경건한 백색 형광등 빛에 묵직한 한 방을 맞았다. 맞으면 아파야 하는데 기분이 좋으니 어찌 된 일일까.


나이 든 부부의 새벽 작업 준비에 기쁜 경외심이 들었다. 새벽 공기를 호젓하게 가르던 이방인은 발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그들의 소리 없는 일과 시작에 혹여 방해라도 될까봐서, 화답하듯 잠시 잠깐의 침묵. 곧이어 뚜걱거리는 굽은 종종걸음에서 활보가 되었다. 더없이 상쾌한 새벽이자 아침이다.


새벽 6시 집 앞과 신문 가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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