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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May 27. 2022

스페인 한량의 취미

세 가지를 소개합니다

[ 외국어 ]


태어나 처음 배운 외국어, 영어가 재미있었습니다. 다른 글자를 쓰고, 전혀 모르는 말로 소통을 하는 게 그렇게 신기해 보일 수가 없었어요. 외국어를 배운다는 건 또 하나의 영혼을 가지는 것이라는 고상한 문장까지 아니어도, 영어를 배우는 건 그전까지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을 신선하게 발견하고, 의문을 갖게 하며, 한번 더 생각해 보게 만들어주게 만들었지요. 언어를 사용한다는 건 말의 전달만이 아닌 문화와 관습, 나아가 사람들의 인식까지 형성하는 그릇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는 소름마저 돋았습니다.


하지만 흥미와 재미가 꼭 실력까지 되지는 않는 법이지요. 그렇습니다. 그저 좋아하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노력이 필요해요. 그런데 이미 그 당시에도 영어권 국가에서 살다 온 친구들이 제법 있어서 한국 토종인 저는 아무리 해도 못 따라갈 것 같았습니다. (해보지도 않고 지레 겁먹은거죠) 해서 이쪽은 내가 갈 분야가 아니겠다, 얼른 다른 길을 찾아봐야겠다며 다른 외국어로 눈을 돌렸습니다.

그 계기는 초등학생도 아닌 국민학생 시절, 학습만화라는 이름 하에 수십 번을 읽은 <먼나라 이웃나라>. 각 나라말에 달린 괴팍하고도 웃긴 발음을 따라 읽던 것에 흥미를 느꼈고, 당시 1권에 소개된 프랑스 편은 저의 전공을 프랑스어 정하는 데까지 갑니다.



프랑스어를 전공하며 다른 외국어 수업을 교양과목으로 들었습니다. 우리에겐 한자가 풍성한 어휘를 남겨주고, 고전 풀이의 열쇠가 되듯, 영어권에서는 라틴어가 그 역할을 톡톡히 합니다. 라틴어 수업을 들으니 어원에 대한 지적 흥미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덕분에 로마자를 사용하는 어지간한 언어들의 여행 회화책과 기초, 첫걸음 등을 두루 사보며 나중에 현지인들을 만나면 꼭 써 봐야지 하는 꿈까지 꿔 봅니다.

성인이 되어 슬로바키아로 일하러 떠났습니다. 영어로도 생활이 가능하긴 하지만, 현지화를 추구하는 저에게 유럽은 그야말로 언어의 노다지라 할 수 있는 곳이었지요. 각 나라마다 언어가 (거의) 다 달랐으니까요. (물론 답답함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구글 번역기도 AI도 아니니까요.) 슬로바키아어를 독학하다가 일상용품들 포장지와 설명서에 적힌 체코어, 폴란드어, 세르비아어, 슬로베니아어에도 관심이 생겼습니다. 물론 동구권에서 가장 인기 있는 독일어에도 다시금 향학열을 불태웠습니다.

그 말이 거의 그 말 같다 싶을 정도로 너무나 비슷하게 써져 있거든요. 활자중독증에라도 걸린 듯 제품 설명서를 열심히 읽어 보고 자문자답하며 맨땅에 헤딩하며 언어를 또 배워갔습니다. 그리고 출장과 여행에서 현지인을 만났을 때, 몇 마디를 써 봅니다. 인사말만 했을 뿐인데 대번에 자기 나라말 잘한다며 굉장히 좋아합니다. 우리도 그러잖아요. 외국인이 서투른 한국말로 길을 물어보면, 잘한다고 칭찬부터 우선 해 주고,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고 싶은 그런 마음이요. 생김새는 달라도 마음은 통하는가 봅니다.

알파벳으로 쓴 슬라브어를 읽다가 욕심이 생겨 러시아어, 불가리아어처럼 키릴 문자도 익혔고, 한발 더 나아가 그리스어 글자도 곧잘 읽게 되었습니다. 전부 호기심의 낳은 산물이고, 관심의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저 간판이나 과자 이름 정도나 읽을 미비한 수준입니다. 그럼에도, 라섹 수술 이후 안경 없이도 사물이 보이던 그때 그 순간의 감격처럼, 외계어에 지나지 않던 글자가 읽히고 뜻을 파악하게 된 순간의 감동은, 뉴런과 시냅스의 대폭발로 뇌 안에서 정점을 찍습니다.

스페인에 사는 지금도 제품 포장에 적힌 언어들을 읽으며 혼자 놀래고, 감탄하고, 이마에 손을 짚곤 합니다. 외국어를 배운다는 건 벽에 창문을 하나씩 달아 놓는 일입니다. 배울수록 찬란한 햇살이 들어옵니다.




[ 악기 ]


-피아노-

외국어와 악기를 배우는 건 '소리'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누구나 그렇듯 저 역시 피아노를 먼저 배웠습니다. 어렸을 때 수영, 태권도, 미술, 웅변 (네, 그런 학원이 다 존재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스피치 학원이 되겠네요) 등 다양한 학원을 다녀보곤 했는데요. 몇 개월을 못 갔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일단 운동을 멀리하는 건 여전합니다. 미술은 그냥 못 그렸습니다. 동생과 저는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정반대였어요. 다니는 둥 마는 둥 하는 저의 눈과 귀를 유일하게 붙잡은 건 피아노 학원이었습니다.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고요. 남자는 보통 청각보다 시각에 발달한다는 데, 저는 예외였나 봅니다.


어머니께선 피아노 학원도 한 달 정도 다녀보고 말겠지 했는데, 의외로 계속 다니고 싶다고 하자, 한 달을 기다렸다가 그때에도 다니고 싶다면 다니자 하셨고, 저는 정말 그 한 달을 기억하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게 다닌 게 무려 3년을 거쳐갑니다. 이후에는 개인 레슨을 받았지만, 너무도 쌀쌀맞은 대학생에게 지적만 받다가 재미없게 끝내고, 심지어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정든 피아노를 파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피아노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이제는 공부 좀 해야 되지 않겠냐라는 말씀이 있으셔서요)


-오보에-

아버지께서는 공부 하나만을 바라보시고 피아노를 팔으셨는데, 시대를 앞서가는 어머니께서는 '어머나, 피아노가 없으니 이제 다른 악기를 시켜봐야겠구나.' 하시며 교회 오케스트라에 세울 큰 그림 속에 저를 지휘자님에게 데려가셨습니다. 당시 중3인 저는 플루트를 배우고 싶었습니다. 아는 악기가 그것밖에 없기도 했고, 교회 찬양팀에서 그걸 부는 아이가 멋져 보이기도 했거든요. 그렇지만 지휘자님은 그런 친구는 많으니 다른 악기를 하라 하셨습니다.

그다음 떠오른 건, 클라리넷이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당시 밤 10시면 항상 듣던 '별이 빛나는 밤에', 아니 '당신의 밤과 음악'의 시그널 뮤직이 클라리넷이어서였어요. 클래식을 좋아하다 보니 제가 듣는 건 다들 좋아하는 MBC 라디오 표준 FM 95.9 MHz 가 아닌 KBS 제1FM 93.1 MHz 였거든요. 그러나 그 역시 배우는 학생이 많다시며 트롬본 아니면 오보에를 추천하셨습니다. 그렇게 오보에를 배우기 시작했고, 오보에는 가장 싫어하면서도 제일 사랑하는 악기가 되었습니다.

오보에를 불면 엄청난 압력 때문에 혈압은 물론 안압도 높아집니다. 자칫하단 쏟아질 거 같아요. 게다가 양볼 또한 터질 듯이 불룩해지면서 단숨에 낮술 걸친 홍조 인간을 만들거든요. 그러니 안 그래도 외모에 자신 없는 저로선 정말 극혐할 수밖에요. (이 정도면 거의 악기의 빌런급이라 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동시에 더블리드를 통해 나오는 애절한 소리가 어찌나 황홀한지 (물론 제가 아닌 전문인의 연주였지요) 수년간 배워온 피아노를 2순위로 둘 정도로 한번 들으면 헤어 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마법의 음색이었습니다. (가히 악마의 악기라도 봐도 무방합니다.)


배우는 사람이 없어서 배우게 된 어정쩡한 출발이었지만, 오보에와 함께 하는 시간은 고통의 시간이자 환희의 시간, 그야말로 양가감정의 대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덕분에 교회와 대학 오케스트라는 물론, 뮤지컬의 관 세션으로도 활동을 했지요. 오보에가 아니었으면 절대로 경험하지 못할 일들이었습니다.


-다시 피아노로-

오보에는 안타깝게도 '리드'가 절대적인 터라, 리드를 다루지 못하면 안 되는 악기입니다. 악기를 연주하는 것 이상으로 리드를 자르고, 깎고, 다듬고, 조이고, 끊고, 테이핑을 하는 작업하는 기술을 연마하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이런 태생적인 이유로 취미로 하는 사람이 드물 수밖에 없는 악기였습니다. 저 역시 리드 공예를 배우지 못한 까닭에 오보에는 어쩌다 한 번 꺼내보는 악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대신 다시 피아노로 돌아가 집에 있을 때의 하루는 피아노로 하는 마무리 하는 게 루틴으로 잡혔습니다. 어쩌면 해외생활이다 보니 노래방이 없어 감정을 내지를 곳이 없어서 피아노 건반을 통해 희로애락을 쏟아붓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타이핑을 두드릴 때의 후련함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강렬한 터치가 에너지의 발산을 확실하게 끌어주고 그만큼 해소되는 카타르시스 또한 확실합니다. 물론 항상 포르테시모로 손가락 부서져라 내리치는 곡만을 연습하는 건 아니고요. 확실한 건, 피아노는 감정의 든든한 친구라는 점입니다. 아래 글의 경험처럼요.



 



[ 필사와 글쓰기 ]


제가 가진 취미 중 가장 늦었지만, 제일 애착을 갖고 가급적 꾸준히 하고자 애쓰는 것이기도 합니다. 브런치에 입문하면서 우연히 마주하게 된 <팀라이트> 그리고 <따스한 문장> 두 커뮤니티는 저에게 따스함을 느끼는 가족이자 숨 쉬며 살게 하는 산소입니다. 지난 2년간의 시간, 코로나로 본업을 잃고 헤매고 방황하며 힘든 시간을 보내는 동안 웃음을 잃지 않게 해 주었습니다. 그곳에서 주고받는 격려, 위로, 용기, 칭찬, 그리고 즐거운 아무말대잔치는 저를 저답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스테르담 작가님을 중심으로 '글로 노는 사람들'이라는 모토 아래 함께 모이고 (중간에 사정상 그만둔 작가님들도 계시지만) 나누는 동안 1년이 조금 지난 시간은 글을 통해 저를 돌아보게 만들었습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가들과 같이 하는 시간은 저의 어떤 것이든 받아주는 고마운 고향이 되었습니다. 아이디어가 선한 영향력의 결실로 나타나기까지 작가님들의 관심과 노력이 빛을 발하는 곳입니다.

지금도 변함없이 배달되는 담백한 금요 레터로 제 삶을 돌아봅니다.

눈요기 거리인 인스타에서 팀라이트 작가님들의 감성과 지성 가득한 문구로 의미 있게 보냅니다.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 통찰력 넘치는 밤 '인사이트 나이트'로 서로를 성장시킵니다. (스페인은 낮입니다)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글력(달력)을 만들고, 작가 본인의 목소리로 녹음도 해보며 성취감을 맛봅니다.

서로가 서로를 챙겨주는 속에 외부 강연으로도 이어지는 좋은 기회를 경험합니다.

지금 쓰는 이 글 또한 팀라이트의 공동 매거진임을 알고 계실 겁니다.

이러니 팀라이트를 고향 같은 곳이라 느낄 수밖에요.


한편, 따스한 문장에서 받은 첫 필사 문장과 미션 질문에서의 저릿한 감동과 전율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도 잊지 못할 겁니다. 왜냐하면 저라는 존재와 가치에 대해 거짓말처럼, 마술처럼 아픔을 사르르 녹여준 문장이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문장을 쓰고 사진 찍어 올리라는 공지대로 따른 후 그 반응이란...

전혀 기대해 보지 못한, 기대할 수도 없었던, 세상 어디에도 없던 관심과 환대, 그리고 문자 그대로 따스함으로 범벅이 되어, 내가 정말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되는 걸까 하는 의구심마저 갖게 했습니다. 진정성 있고, 진심 어린 분위기 속에 어느새 이 모임 또한 1년이 넘는 시간을 한 번의 쉼 없이 지속하고 있습니다. 이변이 없는 한 따스한 문장과의 만남도 이어질 겁니다. 팀라이트가 푸근한 마음의 고향이라면, 따스한 문장은 정 가득한 시골 할머니 댁입니다. 첫 만남의 감동을 잊고 싶지 않아 그때 쓴 글을 공유합니다.



필사 문장을 바탕으로 일기 쓰기를 다시 합니다. 브런치나 인스타에는 매일 못 올려도 저만의 일기장에는 글이 쌓입니다. 검열할 필요도 없고, 좋아요와 댓글 개수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글쓰기로 진정한 내면을 들여다 보고, 문제가 있으면 근원지까지 눈치 보지 않고 파내려 갑니다. 내가 가장 나다워지는 순간이며, 나를 나로서 올바르게 정립해 가는 과정입니다.

 

놀라운 건 위 세 가지 취미의 방향이 모두 나를 향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나 혼자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습니다. 혼자 있어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잘 보냅니다. 그렇지만...

남의 말을 배운다는 건 당신과 소통하기 위함입니다.

연주는 당신이라는 관객이 있을 때 비로소 공감이 오갑니다.

글쓰기는 평범한 나를 보이는 일이지만 당신이 있기에 특별해집니다.




글쓰기로 우주정복을 꿈꾸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라이트가 되었습니다. 팀라이트 매거진에는 매월 한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각양각색 이야기를 작가님들의 다른 시선과 색깔로 담아갑니다. 이번 달 주제는 < 취미 >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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