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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풍선 Jan 24. 2022

민주적인 좀비 (4)

토론이 끝나고 비싼 아파트 광고가 나오자 아빠는 입을 다물었다. 다 무너져가는 주택에 살고 있어서 그런지, 아빠는 집 이야기만 나오면 얼굴이 시뻘개지면서 말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닌 광고에도 그는 반응했다. 아빠가 계속 일했어도 어차피 못 살텐데. 난 슬쩍 엉덩이를 들고 방으로 향했다. 과제를 끝내야 했고 팀플을 위해 필요한 자료를 찾아야 했다. 다음주엔 생계지원을 신청해야 했기 때문에 필요한 서류도 정리해야 했다. 미리 정리해서 신청해두지 않으면, 동사무소랑 구청을 너무 많이 왔다갔다해야 했다. 난 소리를 내서 괜히 붙잡히지 않으려고 살살 움직였다.


띠리리릭.


타이밍이 안 좋게 문이 열렸다. 엄마가 들어왔다. 나는 얌전히 자리에 다시 앉았다. 방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엄마는 퇴근하면 무조건 나와 대화를 나눠야 했다. 그녀는 자신의 노력을 매일 인정받아야 했고, 자식이 자신의 노력에 부합하는 인생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했다. 아빠를 무시하고 비아냥거리기 위한 관객이 필요하기도 했다. 엄마가 일을 하지 않으면 가정이 무너졌기 때문에 나와 아빠는 그런 엄마의 말을 얌전히 듣고 있어야 했다.


엄마는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엄마는 내가 밥은 잘 먹었는지, 취업 면접은 늦지 않게 갔는지, 가서 준비한 말은 다했는지, 당당한 걸음걸이를 했는지 그 모든 것에 하나하나 관심을 가지고 내게 질문을 퍼부었다. 그녀는 그래도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내가 자신의 인생을 바꿔줄 거라는 희망으로 매일 나를 바라봤다. 물론 엄마는 바보가 아니다. 취업이 어렵다는 걸 모르진 않는다. 하지만 엄마는 내가 30분 정도 일찍 일어나서 자기계발서에서 시키는 것처럼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으면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무엇을 할 수 있는 건지 나는 모르지만 엄마는 확신이 있었다. 그녀는 내가 자신과는 다르게 살 거라는 믿음에서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엄마의 걱정은 의미가 없다. 그건 걱정이 아니다. 걱정은 무언가를 하는 게 어려울 때 드는 감정이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한 가지를 해내는 것은 내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다. 실패한 아빠와 PTSD에 시달리는 엄마와 함께 살면서 내 그림자는 작아졌다. 대학을 가지 않고 일을 하면 달랐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엄마는 무조건 내가 대학을 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내 의사를 묻지도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학의 학과로 원서를 냈다. 난 잘 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살았다. 무언가를 얘기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고, 무언가를 들키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엄마는 매일 면접이 어땠냐고 묻지만, 난 한 번도 면접을 본 적이 없었다.


엄마는 10년 동안 가디건을 대충 던지고 내 앞에 앉았다. 소독제 냄새가 훅 풍겼다. 대민상담업무를 하면서 엄마는 매 시간 소독제를 발랐다. 진상들에게 최대한 깔끔한 느낌을 줘서 싸움을 만들지 않기 위함이었다. 난 그 소독제에서 풍기는 알코올 냄새가 싫었다. 엄마는 나를 빤히 바라봤고,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엄마의 눈에는 기대가 있었다. 그녀의 기대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엄마가 볼 때 나는 어려운 집안환경을 극복하고 수도권의 대학에 합격한 효녀였다. 하지만 그건 한 번이다. 인생에는 한 번의 기회가 있긴 하지만, 성공한 인생을 위해서는 여러 번의 기회가 필요하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여러번의 기회는 환경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하다.


엄마는 당연하다는 듯이 면접 이야기를 꺼냈다. 지난 번에 거짓말로 지어낸 면접 이야기를 아직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빠는 그 이야기가 거짓임을 대충은 아는 눈치였지만, 그래도 엄마 앞에서 그 이야기를 할 만큼 눈치가 없진 않았다.


“그래서 유민아 오늘 면접은 잘 봤어?”


“잘 모르겠어.”


“왜왜 어땠는데?”


“그냥 뭐...면접이지.”


“너는 엄마가 실망할까봐 꼭 이런 거 이야기 안 하드라. 편하게 이야기해도 돼. 엄마가 너 떨어졌다고 뭐라고 한 적 없잖아.”


“여보, 애 피곤한 거 같은데 굳이 물어보지 말지.”


“당신은 왜 또 시비야. 내가 딸이랑 좋은 저녁시간 보내면서 서로 좀 위로하겠다는데. 정작 우민이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잖아. 우민아 엄마랑 이야기하는게 힘드니? 아니지?”


불편했다. 부모님은 모두 나를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했고, 모도 나를 위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사랑이 없었으면 내가 지금까지 살아남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난 그 사랑이 어려웠다. 그들이 나를 사랑하면 할수록 나는 말라갔다. 차라리 부모님이 나에게 별 생각이 없었다면, 나는 그들을 더 편하게 대할 수 있었을 게 분명했다. 엄마는 매일 아빠를 욕하고, 아빠는 엄마에게 어떤 위로도 되어주지 못했지만, 그들은 가족이라는 틀로 묶여있었다.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우리 부모님과 어떤 것을 묶여있지 않았다.


엄마는 내게 무언가를 물었던 사실을 잊고 아빠에게 감정을 쏟아냈다. 엄마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낡은 집이라서 목소리를 쩌렁쩌렁 울렸다. 그녀는 이성을 상실하고 인생에서 생긴 모든 불행의 책임이 아빠에게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빠는 살짝 각도를 바꿔서 티비로 눈을 고정시켰다. 이미 정규편성이 끝난 티비에는 애국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일어나 신발장으로 향했다. 엄마의 화는 늦은 새벽까지 이어질 것이 뻔했다. 나는 그냥 걸었다. 오늘도 4시 전에 잠들기는 글렀다.


“학생, 청춘을 즐기는 건 좋긴 하지만, 그래도 적당히 사려가면서 놀아야 되는 거 아닌가. 어제 클럽에서 밤 샌 거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몸 막 쓰면 뼈 삭아. 좀비 되기 전에 놀아야 한다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여학생이고 하니까 좀 적당히 놉시다. 강의시간에 자지 말고. 아 여기서 좀비라는 단어가 누구를 비하하려는 건 아닙니다.”


교수님의 말에 학생들이 웃었다. 나를 정확히 지목하면서 자지 말라는 교수님의 표정에는 장난스러움이 가득했다. 교수님은 내가 수업시간에 잠을 자든, 딴 짓을 하든 그렇게 신경쓰지 않았다. 아마도 교수님은 진심으로 청춘시절을 의미있고, 즐겁게 보내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나는 알 수 없는 민망함을 느꼈다. 그건 수업시간에 자고 있었던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에서 비롯된 것도, 나를 보고 웃었던 사람들에 대한 민망함에서부터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졸음과 피곤함은 인생의 의미와 즐거움에서부터 시작하지만, 나는 어떤 의미나 보람도 없이 그냥 졸리고 피곤했을 뿐이다. 누군가의 밤에는 새로운 인연이 있었지만, 내 밤에는 삭막한 불면과 다음날 이뤄질 무의미에 대한 갑갑함만이 있었다.


물론 지금 이 강의실에 있는 대학생들은 거의 불안한 청춘이었다. 좀비로 인해서 경제는 위축되고 있었고, 청년의 삶이 어렵다는 이야기는 너무 당연한 것이 되어서 이젠 이야기조차 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하고 싶은 것을 찾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았다. 내 삶이 이렇게 흘러가도 되는 것인지 씁쓸하긴 했지만, 그런 감상에 젖을 시간도 없었다. 우리는 그냥 우리의 삶이 최악의 방식으로 끝나지 않도록 견디고 있었다. 모든 청년은 힘들고 불안했다.


그렇지만 나는 우리 모두가 힘들다는 그 사실 자체에 짖눌리고 있었다. 내가 겪는 불행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더 힘든 것이고 어려운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풍비박산난 집은 이곳에 수도 없이 많고, 취업이나 진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하는 청년도 길가에 널렸다. 1개의 직업이 아니라 2,3개의 직업을 돌아가면서 해야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은 말로 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건 당장 술집 거리에 가서 보도블럭에 흩뿌려진 대리운전 명함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내 가정환경이, 윗집에서 물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우리집 천장이, 매일 밤 12시에 떨어진 고개를 버티고 있는 내 어깨가 특별한 건 아니었다. 그건 어디서든 퍼져있는 불행이었다. 심지어 사람들이 이렇게 둥둥 떠나디는 병에 걸린 시점에서 조금 바쁘다는 것이 불행에 속하기는 할까.


매일같이 다행이라는 말이 쏟아진다. 부유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라고. 가족 중에 부유병에 걸린 사람이 없다는 게 행운이라고. 방송에서는 연일 부유병에 걸리는 순간, 한 가정이 어떻게 파탄나는지를 보여주고 있었고, 주식뉴스에서는 부유병으로 인한 경기침체가 얼마나 심각한 지를 이야기한다. 부유병에 걸린 사람의 그 처참한 모습은 매일 생중계되고 있었다. 우리가 알던 좀비들처럼 뛰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을 물지도 않기에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강남역 사거리를 걸으면서 좀비를 보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데 반해, 뉴스는 그 좀비의 기괴한 형상을 클로즈업으로 담고 있었다. 그런 모습과 부유병 좀비 앞에서 슬퍼하고 있는 그들의 가족을 보다보면, 내가 부유병에 걸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행운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전자로부터 나온 다행이라는 감각은 나를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난 분명히 누군가보다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내게는 내 삶을 더 나아지게끔 노력할 의지가 생기지 않았다. 주어진 시간을 즐기거나 삶의 작은 순간에 행복해하는 것도 어려웠다. 아주 운이 좋게 부자가 되길 바라면서 사는 것도 아니었는데, 지금의 삶에 큰 의미가 없었다. 모두에게 환경이 다를 수 있고 그게 행복과 상관없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난 내 환경 때문에 매일 우울했고, 그걸 극복하는 건 너무 어려웠다. 그건 부끄러운 일이었다. 남들보다 작은 불행에 이렇게 휘둘리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청춘을 적당히 즐기라는 말에 얼굴이 빨개진 이유는 잘 노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내가 전혀 즐기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난 지금 겪고 있는 시간과 앞으로 겪을 시간 중 어떤 것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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