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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풍선 May 30. 2022

가장 혁신적인 기업의 가장 진부한 사람 (9)


“아 그래요? 그 일이 제 일이라구요? 전 원래 식물을 관리하기로 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 빌어먹을 것들을 들여온 사람도 아니에요. 일 하나 처리하기 쉽네요. 그냥 대충 욕먹고 있는 사람한테 이거 왜 해결 못하냐라는 메신저 몇 번이면 막 책임이 넘어가네요? 웃기네. 체계가 없어.

아니, 체계가 없는게 아니라 물품지원팀을 우습게 보는건가? 다른 중요한 일들도 다 이렇게 처리하나요? 보니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은 시장분석도 하고, 프로토타입도 만들면서 업무를 나누던데, 이런 하찮은 일은 그냥 대충 이런 식으로 시켜도 되나봐요.”


“민서씨 너무 과잉반응인데요? 사람들이 가끔 민서씨가 이상하다고 뭐라고 하는 걸 들었는데, 그게 과장인 것만은 아닌가봐요. 저는 생각해서 이야기한 건데.”


과잉반응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민서의 얼굴은 붉어졌고, 그녀는 말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제 말 끊지 마세요. 그리고 누굴 생각하셨다는 거죠? 저를 문제있는 애로 취급하고서 도와주겠다고 하면 제가 감사해야 되나요? 전 이 회사가 진짜 지긋지긋해요. 특히 말도 안되는 일을 하려고 하면서 그걸 왜 자꾸 좋은 일이라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되네요. 친절한 말투로 한다고 다 좋은 건 아니잖아요. 그냥 일을 키우지 않을 뿐인 걸 가지고, 좋은 해결이고 생각해주는 거라고 포장하진 마세요.

그리고 아무도 문제를 해결하거나 원인을 찾을 생각도 안 해놓고서 자율성을 얘기하는 것도 이젠 지긋지긋해요. 엄청 자율적으로 일하는 것처럼 하고, 사실 귀찮고 하기 싫은 일은 이런 방식으로 떠넘기는게 티모의 방식인가요? 이게 혁신적이고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는 거라면 세상은 사실 안 바뀌는게 더 나을 걸요?”


“민서씨 말이 너무 심하잖아. 해야 할 일은 안 하면서, 티모 전체를 이런 방식으로 모욕하는 건 좀 아니지.”


“이렇게 말하는 건 모욕이고, 저한테 그동안 티모의 직원들이 행동했던 건 모욕이 아니에요?”


“아니 설사 다른 직원들이 뭐라고 하는게 문제적이었더라도, 지금 저희한테 이렇게 행동하는 건 괜찮은 거야!”


“그동안 아무것도 안하셨잖아요. 제가 혼자서 욕먹고 힘들어하는 동안 아무런 일도 안 하시다가 이제서 자기들까지 욕먹으려고 하니까, 저한테 선심쓰는 것처럼 오셔서 이야기하시는데, 제가 어떻게 이렇게 행동 안 하겠어요.”


정적이 흘렀다. 물품지원팀의 다른 팀원들은 억울했다. 그들도 피해자였다. 자기들도 분명히 계속 민원에 시달려왔다. 그렇기에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민서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민서와 눈이 마주쳤을 때 왠지 모르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자 민서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안그래도 말씀드리고 싶은게 있습니다.”


“후..또 무슨 일인데요?”


“저 그만두려고 합니다. 사직서 제출할 예정이에요. 일정리하고 이번 달까지만 일하겠습니다.”


“그만둔다구요? 지금 식물관리도 하나도 안되어있는 상황에서 민서씨가 그만둔다구요? 민서씨,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아요? 진짜 이런 말은 안하고 싶었는데, 이런 식으로 그만두면 민서씨 이 회사 사람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을지 몰라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식물을 관리하는게 제 일은 아니구요. 뭐 무슨 이야기를 들을지 모른다고 하는데, 지금도 제 이야기 많이들 하고 계시잖아요. 뭐 나름 혁신적인 조직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광고해서 그런지 제가 앞에 오면 과하게 친절한 척하면서 인사하고 그러던데, 그러느니 여기 안 나와서 얼굴이라도 안 보는게 마음 편하죠. 하고싶은 욕 마음껏 하세요. 이제는 없을 거니까 애써서 그래도 중립적인 척, 합리적인 척 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편하시겠네. 사직서 안 받는다고 해도 이번 달 지나면 그냥 안 나올 겁니다.”


물품지원팀의 팀원들은 서로를 쳐다봤다. 그들은 얼이 빠져있었다. 굳이 따져보자면, 그들은 민서가 나가길 원했다. 지금 상황에서 민서가 나가서 그녀가 정말로 이상한 사람이 된다면, 그들은 모든 책임을 민서에게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팀원들은 민서가 사직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그만두면 진짜 자기가 악당이 되는 느낌이었다. 민서는 뉴스에서 나오는 피해자 같은 거였고, 회사는 악마같은 곳이었다. 억울했다. 그렇지만 팀원들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민서에 대해서 뒷말을 하며 알아서 사직해줬으면 한다고 말을 많이 했지만, 실제로 사직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는 것을 그들은 그제서야 느꼈다.


민서는 의자를 빼고 일어났다. 의자에서는 쇠가 긁히는 소리가 들렸다.사람들은 흠칫했다. 민서는 누구에게도 시선을 두지 않고, 누구에게도 나간다는 이야기가 없이 그 공간을 빠져나갔다. 물품지원팀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민서의 퇴사소식은 금세 주식회사 티모에 퍼져나갔다. 직원들의 반응은 두 부류였다. 절반의 직원은 민서의 퇴사가 무책임한 일이라고 이야기했다. 여름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고, 화분에서는 여전히 썩은내가 났다. 민서는 식물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고 퇴사를 했다. 그것은 직무유기였다. 나머지 반은 민서가 떠난 것을 반겼다. 그들이 보기에 민서는 변했다. 매일 사람들을 보며 기분좋게 웃던 모습은 사라졌고, 더 이상 의욕적으로 일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티모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어떤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지에 대하여 궁금해하지 않았다. 주식회사 티모에 자발성이 없는 직원은 필요하지 않았다. 티모의 주축을 담당하는 직원 중 상당수는 민서가 잘 퇴사했다고 생각했다.


민서가 퇴사를 하기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식회사 티모에서 민서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는 직원은 더 많아졌다. 민서가 퇴사하면서 말한 대로였다. 직원들은 출근할 때마다 나는 냄새를 맡을 때마다 민서를 떠올렸고, 서로서로 민서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의 퇴사가 안타깝다는 형식적인 미사어구로 시작하는 대화는 그녀의 비합리성, 그녀가 사실은 멀쩡한 상태가 아닐 거라는 예측, 티모와는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단정, 물품지원팀에서도 하는 일이 없었다는 확신으로 끝났다. 티모의 직원들은 민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주식회사 티모가 창조적이며 열정이 가득한 직장이고, 직원들은 자율적인 책임과 존중으로 개방적인 조직문화를 가지고 있는 공간이라는 점을 확인하는 듯 싶었다.


민서에 대한 이야기가 회사에서 모래먼지처럼 돌아다니는 동안, 정주의 존재감은 사라졌다. 정주는 더이상 주식회사 티모에서 이질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아무도 정주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지도 않았고, 누구도 정주에 대하여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정주를 복도에서 만날 때 머뭇거리는 경우도 이제는 없어졌다. 더 이질적인 존재가 등장함으로써 정주는 주식회사 티모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타이틀에서 벗어났다. 정주는 티모에서 처음으로 익명이 되었고, 거기에서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


정주는 식물로 회사가 시끄러운 동안에도 그냥 주어진 업무를 충실히 했다. 식물은 건들이지도, 관리하지도 않았다. 정주의 일상은 보통의 교육기획팀이었다. 물론 교육기획팀에게 정주는 여전히 어려운 사람이었다. 교육기획팀 사람들은 정주와 목관의 싸움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냄새가 생기게 된 이유가 정주가 식물관리를 중단했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주가 조용히 자신에게 주어지는 리서치에 집중했고, 목관이 정주에게 그 날의 일을 이야기하지 않는 이상, 직원들이 정주에게 식물을 주제로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정주는 그냥 평범한 티모의 직원인 것처럼 보였다.


정주는 주로 1층에 머물렀다. 1층에는 화분과 흙이 많아서 이상한 냄새가 가장 많이 올라오는 곳이었다. 정주가 1층의 화분을 관리할 때까지만 해도 1층은 모든 직원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곳이었지만, 지금 1층에는 억지로 자리를 지켜야 하는 리셉션, 경비, 카페 아르바이트 말고 어떤 직원도 가기를 꺼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주는 1층에 있는 업무공간에서 주로 일을 했다. 냄새가 상당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하루 종일 그곳에서 자신의 업무를 수행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사람들이 1층을 들어가고 나가면서 어떤 표정을 짓는지를 틈틈히 관찰했다. 표정의 변화는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유지하면서 그녀의 눈은 계속해서 사람들을 쫓았다.


정주의 표정이 변한 유일한 순간은 민서가 퇴사후 짐을 가지러 왔을 때였다. 민서의 짐은 얼마되지 않았다. 매일매일 물품을 챙기는 물품지원팀에서 일했던 민서에게 가장 쉬운 물품지원은 자신의 짐을 챙기는 것이었을 것이다. 작은 박스 하나. 작은 쇼핑백 하나에 민서의 짐은 다 들어갔다. 원래 짐을 얼마 두지 않았는지, 그동안 조금씩 짐을 치웠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항상 덤덤한 표정을 유지하던 정주는 흔들리는 표정으로 민서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로비를 거쳐 문을 나서는 순간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티모에서 민서를 계속해서 바라보는 사람은 정주 뿐이었다. 다른 직원들은 애써 민서가 나가는 장면을 보지 않았다. 평소보다 많은 사람이 회사의 복도에 나와서 1층쪽으로 몸을 기대고 있었지만, 그들은 민서에게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티모가 있는 건물의 문은 제법 크고 무거웠다. 아무리 가벼운 짐이라고 해도 양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는 사람이 편하게 열기는 어려웠다. 민서는 양손에 짐이 있었고, 그 문을 그녀가 자연스럽게 여는 것은 불가능해보였다. 민서의 주변에는 누구도 없었기 때문에 문을 잡아주거나 짐을 대신 들어줄 사람도 없었다. 당연하게도 민서는 바닥에 짐을 내려두고 혼자 문을 열려 하고 있었다.


정주는 빠른 걸음으로 민서를 향해 다가갔다.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민서의 앞에 있는 큰 문을 열었다. 문은 스르륵 열렸다. 민서와 정주의 눈이 마주쳤다. 정주는 머뭇거리다가 민서에게 목례를 했다. 웃음도 슬픔도 유감도 담지 않은 그냥 인사였다. 민서는 잠시 정주의 인사를 물끄럼히 바라봤다. 그리고 정주가 고개를 들자 민서 역시 정주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민서의 얼굴에는 살짝 웃음기가 돌았다. 둘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민서는 내려놓으려던 짐을 내려놓지 않고서 문밖을 나갔고, 정주는 다시 자신의 노트북 앞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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