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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풍선 Jun 09. 2022

가장 혁신적인 기업의 가장 진부한 사람 (10)

민서가 주식회사 티모를 나간 밤, 주식회사 티모의 메신저에는 장문의 글이 올라왔다. 정주의 이름으로 올라온 글이었다. 그건 어떤 안건을 담고 있는 것도, 어떤 정보가 담겨있는 것도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주식회사 티모 여러분.

교육기획팀의 이정주사원입니다. 말씀드려야 할 사항이 있는 거 같아서 메신저에 글을 올립니다.


우선, 그동안 주식회사 티모에 있는 각종 화분들, 인테리어용 식물들을 관리해오던 건 저입니다. 때가 되면 물을 주고 버리고, 영양제를 놔주고, 흙을 갈고 하던 것은 다 제가 하던 일이었습니다. 누가 가져다 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회사에는 화분이 많았고, 아무도 이걸 챙기지 않아서 제가 챙기고 있었습니다. 물론 제가 화분을 챙기는 시절에 여러분이 보는 저는 기획일에 집중하지 않고 복도를 돌아다니면서 딴짓이나 하는 사람이었을 겁니다.


제가 어느 순간부터 화분을 관리하지 않게 된 것은 교육기획팀 회의에서 팀장님으로부터 제가 하기로 정해진 일이나 집중하라는 이야기를 듣고 난 후부터입니다. 기획팀으로 들어왔으면, 창의성을 발휘해서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일에 집중해야 하며, 화분을 관리하는 일같은 건 신경쓰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고, 저는 그 지시에 응했습니다. 계약서에 정해진 일을 하라는 지시를 명시적으로 거부할 명분은 없으니까요.


그래서 가만히 있었습니다. 회사의 모든 직원들이 괴로운 여름을 보내고 있었지만, 제가 그 문제를 해결하기로 계약서에 싸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상급자인 팀장님이 특별한 조치를 요구하지도 않으셨구요. 개인적으로도 팀에서 더이상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바보가 아닙니다. 제 팀원들이, 팀원이 아닌 다른 직원들이 제 뒤에서 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제 앞에서 신사적으로 행동하시려고 애쓴다고 해도 매일 회사에 올 때마다 이상한 사람이 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었습니다. 아무도 저에게 화분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는 그 시간이 너무 편했으니까요. 솔직히 말하면, 여러분에게 힘들었던 그 냄새 나는 여름이 저에게는 이 회사에서 가장 편안한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조금 나은 여름을 보내는 동안, 저 대신 괴로워하던 사람은 물품지원팀의 민서님이었습니다. 다들 민서씨가 무능력하고, 무책임하며, 이 회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모습을 모두가 비난하던 것을 기억합니다. 맞습니다. 민서씨는 이 회사와 맞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의욕없고, 무기력하게 된 것은 오로지 이 회사의 책임입니다. 주식회사 티모는 가장 열려있고 열정적인 조직문화를 가진 곳이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그게 맞습니다. 그렇지만 민서씨에게는 오히려 열려있는 회사의 모습이 좌절이었을 것입니다. 제가 그랬으니까요.


사실 이 회사에 퍼져있는 냄새는 한달 동안 여러분을 괴롭힐 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구라도 이 냄새를 없앨 수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여러분이 일할 때 근처에 있는 화분을 관리해주기만 했어도 하루면 끝날 수 있는 문제입니다. 화분 하나에 물을 주고, 물을 버리고, 정리해주는 일은 30분도 걸리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이 화분들을 관리하지 않더라도 이 회사에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민서씨가 이렇게 많은 직원들에게 비난을 받고 힘들어할 거라고는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제안을 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쓴 것은 아닙니다. 저는 지금의 상황에서 무언가 제안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솔직히 생각나는 것도 없습니다. 그냥 내일부터 화분을 청소하면 되는 일이니까요. 비난을 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쓴 것은 더욱 아닙니다. 티모에 다니는 직원분들 중에 식물을 관리하기로 업무를 부여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중 누구도 악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티모에서 일하고 있는 직원분들 중에 나쁜 사람이 없다는 것도 확실합니다. 우리는 그저 냄새를 최대한 참으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으로 친절하고 사려깊게 문제를 제기했을 뿐입니다.


저는 그저 궁금할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모두 민서씨가 이 회사를 떠나는 걸 봤습니다. 다들 나와 계시더라구요. 민서씨의 마지막을 보신 분 중에 민서씨에게 연락을 하신 분이 있는지 소소한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오늘 저는 용기를 내지 못했지만, 나중에 민서씨와 밥 한 끼 하자고 말하려고 합니다. 같이 하고 싶은 분은 연락주세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글을 올려서 죄송하고, 긴 글을 정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정주 올림.」


정주는 글을 올리고 나서 새벽까지 자신의 노트북을 바라봤다. 메신저에는 어떤 답장도 없었다. 매일 새벽까지도 사업에 대한 토론이 이뤄지거나, 야근을 하는 서로를 격려하던 메신저에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 누군가가 글을 읽었다는 표시만 늘어나고 있을 뿐이었다. 정주의 글을 읽은 직원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 지는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정주는 아루먼 답이 올라오지 않는 메신저를 계속해서 바라봤다.


전날에 무슨 일이 있었고, 그 일로 사람들이 잠을 아예 자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아침이 되면 직장인은 출근을 해야 한다. 주식회사 티모도 마찬가지였다. 9시가 되었고, 사람들은 다시 회사 곳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회사는 평소보다 조용했다. 전쟁이 터져서 미사일이 머리 위에 있어도 입을 놀릴만큼 해맑은 사람들 몇몇이 애써 밝게 인사를 건넸지만 분위기를 바꾸는데 유효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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