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태화 작가 Feb 25. 2024

도서관에서 손 소독제 테러를 당했다


 동네 도서관에 갔다. 여러 사람이 함께 책을 읽을 수 있는 긴 책상이 있다. 낯선 이와의 심리적 거리는 물리적 거리로 표현된다. 누가 규정한 적도, 서로 약속한 적도 없지만 사람들은 알아서 적당히 거리를 두고 앉는다. 나는 끝자리에 앉았고, 대각선 반대편엔 한 어르신이 앉아 신문을 봤다. 그 대각선 반대편에는, 즉 내 옆옆 자리엔 30대 남성으로 추정되는 분이 앉아 자기 공부를 했다. 다시 또 그 대각선 반대편에는... 그렇게 앞뒤좌우 지그재그로 각자의 일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내 대각선 반대편에 앉아 있던 어르신이 신문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 가실 생각인가 보다. 본인 건강을 위해서였겠지. 앉은 자리 근처에는 공용으로 비치된 겔 타입의 대용량 손 소독제가 있었다. 선 채로 이를 들어 올리더니 자신의 손바닥을 향해 꾹꾹 눌렀다. 그리고 일이 벌어졌다.



 아무리 도서관 공용이라 한들, 대용량 손 소독제인 만큼 제품이 금세 새 걸로 바뀌지는 않는다. 이럴 때 발생하는 현상이 있다. 시간이 지나며, 입구 부분에 일부 성분이 휘발되지 않고 남아 굳는다. 어중간하게 막힌 입구는 손 소독제가 원래 의도한 방향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나오게 한다. 그리고 누르는 압력은 그대로인데 입구는 좁아지다 보니 찍-찍- 뻗어나가곤 한다.



 어르신이 들어 올린 손 소독제 역시 그러했다. 그것도 꽤 심한 정도로. 어르신이 누를 때마다 겔 덩어리가 다연장로켓처럼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흩뿌려졌다. 그렇게 흩뿌려지기에 막상 어르신 손바닥에는 원하는 만큼의 소독제가 담기지 않았을 것이다. 이를 보상하려는 듯, 어르신은 더욱 힘껏 소독제를 눌렀고, 그럴수록 소독제 젤은 더 많이 더 멀리 발사됐다. 놀랍게도 그 소독제 젤은 여러 덩어리로 나뉘어 단,중,장거리로 그 거리는 달라도 방향만큼은 한 곳을 향했는데, 하필이면 그 방향에 내가 있었다.






 처음 1, 2번 발사부터 이미 일은 잘못되었다. 투명한 액체가 튀어나오는 걸 본 내 옆옆 자리 남자가 "아!" 하며 짧고 낮은 비명소리를 냈다. 그러나 어르신은 아직 시원치 않은 본인 손바닥 속 소독제 젤의 양만을 바라보며 더욱 강한 3, 4번의 발사 버튼을 눌렀다. 



 사람이 너무 어이가 없으면 가만히 멈춰 있게 된다. 그렇게 일시 정지했던 나조차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저, 어르신. 그만 누르시지요"라고 두 번을 얘기했을 때야 폭격이 멈췄다. 하지만 이미 내 모자 위에서부터 긴 팔 티셔츠의 가슴 부분을 지나 그리고 배 주위에 걸쳐 놓은 롱패딩까지, 그렇게 상반신 전체에 전방위적으로 에탄올 향이 나는 투명한 겔 덩어리들이 달라붙어 있었다.



 사태를 파악하는 와중에, 대각선 우측에서 "미안해요"라는 짧은 한 마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소리만 가만히 듣고 있기엔 나에게 날아온 소독제 겔이 너무 많았다. 이건 단순히 털어내서 될 정도가 아니었다. 빨리 화장실로 가야겠다고 판단하고 나서는 순간, 스쳐가는 시야 속에서 나는 보았다. 그 어르신의 시선은 내 쪽을 향해 있지 않았다. 이미 온몸을 돌려 본인이 봤던 신문을 반납하러 가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며 씻을 건 빠르게 씻어내고, 자리에 남겨 놓은 롱패딩을 구하러 화장실 휴지를 돌돌 말아 다시 열람실로 들어갔다. 스쳐가는 시야 속에서 나는 또 봐버렸다. 휴지를 들고 긴급히 열람실로 들어가는 나의 반대편에서, 그런 나를 인지하고도 엘리베이터 안으로 급히 들어가는 한 어르신의 움직임을.



 자리에 가보니 폭격의 흔적은 그대로였다. 내 옷은 물론이고 책과 수첩, 열람실 책상에도 투명한 소독제 겔이 흥건히 남아 있었다. 



 도서관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모두들 조용히 각자의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 옷에 잔뜩 묻어 있는 소독제를 털어 냈다. 여전히 공용 책상 위를 잔뜩 덮고 있는 에탄올 합성물을 휴지로 닦아 냈다. 어르신이 앉아 있던 자리에도 여전히 투명한 겔들이 남아 있었다. 생각이 많아 3초 정도는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왕 움직인 김에 그것마저 정리했다. 도서관이 아니었다면 혼잣말 한 마디 정도는 내뱉었을 것이다. 



 "AC."






 그렇게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니, 다 원래대로였다. 열람실에서 분주한 건 나뿐이었다.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다. 그래도 자연스레 떠올리는 장면은 있었다. 어르신이 본인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내 몸과 옷에 발사한 소독제 겔 덩어리들을 보고 어쩔 줄 몰라 고심하는 장면. 혹은 직원에게 부탁해 휴지나 물티슈를 구해오는 장면. 당장 소독제를 닦아내야 할 상황이라 이 문제를 갖고 이야기할 틈도 없이 바로 화장실로 왔지만, 어르신이 나에게 다시 찾아와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말씀하는 장면. 그런 무언가는 있지 않을까 싶었다. 



 아무래도 내가 더 빠릿빠릿하다.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릴 틈도 없이 나에게 날아온 흔적들은 내가 처리했다. 그래도 앞서 떠오른 장면들 중 어느 하나라도 있다면, 내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어떤 감정들은 조금은 더 쉽게 스스로 처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하나도 없었다.



 "으악! 어르신! 그만하세요! 뭐 하시는 겁니까! 지금 저한테 소독제를 뿌리고 있지 않습니까!"



 처음 한두 번 소독제 발사에 바로 이렇게 말했어야 했을까?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가해자를 정확히 지목하며 현재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도서관 속 모든 이들에게 알렸어야 했을까? 그랬어야 설령 다른 사람은 모르더라도, 최소한 그 어르신만큼은 본인이 나에게 무슨 일을 한 것인지 정확히 알지 않을까? 어쩌면 본인 자리 근처에 뿌려진 소독제조차 처리하지 않은 채 곧바로 도서관을 떠난 건, 그가 그저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현재 상황 자체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해서는 아닐까?



 생각이 많아졌다. 손 소독제 속 에탄올은 곧바로 휘발했지만, 의문은 그리 쉽게 휘발되지 않았다. 억지로 넘겼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책 3장을 다시 앞으로 돌린 채, 그렇게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햇살 좋은 어느 겨울 날, 도서관에 잠시 들렀다 왔다. 독서는 하지 못하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