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모삼천지교
나는 어린시절 통닭집 딸래미이자 족발집 딸이었다. 그리고 두유집 딸래미 였다가 어느 날에는 우유집 딸래미로 불리기도 했다. 지금은 건재상집 딸이다. 맹자의 어머니처럼 내 부모가 이사를 부단히 다녔던 것은 아니나 어쨌거나 보고 자란 것이 장사였다. 뼛속까지 자연스레 장사의 마인드를 체득한 것이 분명하다. 때문에 취업이 잘 되지 않던 20대 후반에는 자연스레 다음 나아갈 길로 장사에 뜻을 두었다. 내 장사를 시작한 후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시기별로 어떤 것을 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깨치고 있는 스스로를 보며 맹모삼천지교의 교훈이 새삼 놀랍게 느껴졌다.
명절이 다가오는 이맘 때 쯤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초보 김밥집 사장이었지만 알아서 연휴간 쓸 잔돈을 미리 바꾸어 두었다. 그게 명절을 대비하는 나의 첫 자세였다. 그 다음은 말하지 않아도 거래처들의 잔금을 미리 치루는 것이다. 그 들도 식구들과 명절을 걱정없이 보내려면 어느 정도의 잔금 회수는 필요 할 것이라 생각했다. 명절을 쇠러 내려가는 고객들이 차 안에서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일등 메뉴는 김밥이다. 넉넉한 포장 봉투와 포장지를 미리 확보 하는 것 역시 명절을 준비하는 나의 루틴 중 하나였다.
사소하지만 명절 시기에 맞추어 매장 통화 연결음을 휴무 안내로 변경 해 둔다거나 젊은 사장의 재치를 물씬 느끼에 하는 휴무 안내문을 일주일 전부터 써 붙이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혹여나 명절 기간 동안 헛걸음 할 고객을 나름 배려하기 위해서였다. 휴무 안내문을 찍어 오는 고객에게는 할인을 해주겠다는 잔망스런 멘트는 필수다. 누구에게 배운 건지 기억 나지는 않지만 장사하는 집은 언제나 열려 있어야 한다고 내게 신신당부를 하던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 덕분에 나의 부재는 굉장히 고객에게 미안하고 양해를 구해야 하는 부분이라 생각 했던 모양이다.
마지막으로 챙긴 것은 떡값이라 불리는 직원 상여금이었다. 무탈하게 가게가 굴러 갈 수 있도록 신경 써준 주방 실장과 김밥 이모, 보조이모와 알바생들에게 줄 보너스를 신권으로 꼭 바꿔 놓았다. 내 마음을 닮은, 내 고마움을 크고 묵직하게 담은 선물세트로 주문해 두면 장사하는 사람으로서 명절 준비는 얼추 마무리가 된다.
내가 운영했던 김밥집 프랜차이즈 본사에서는 누구 하나 이런 걸 알려주지 않았다. 매장 오픈 할 떄만 기똥차게 챙길 줄 알았지 사후 관리가 영 부족했다고 자신있게 말할수 있다. 가맹점주와 가맹본부 양측에 있어 본 사람으로서 말이다. 부가세 신고는 언제 해야하는지 소득신고는 언제 해야하는지 명절전에는 식자재 발주를 어떻게 하고 남은 식자재는 어떻게 처리해야하는지와 같은 것들은 인지 조차 되지 않기에 못 챙기지 것들 이다. 사소한 하나 하나가 모두 스스로 챙기지 않으면 오롯이 본인 손해로 떠앉는 게 자영업자이다. 운이 좋게도 나는 본투비 장사꾼이요, 장사치였기에 이런 누락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나의 주인이 되는 과정을 지나오는 사람들은 내 부모가 내게 심어준 것처럼 잔지식이 필요하다. 명절이 다가오니 갓 오픈한 신규 점주들 걱정에 잔소리가 많아지는 오후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자라왔을 것이다. 눈나린 밤길,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칠흙 같은 어둠속에서 누군가의 밟아온 흔적을 조심스레 즈려 밟다가 나도 모르게 내 갈 길을 끝끝내 찾아 왔듯 말이다. 장사든 회사든 고단한 하루를 그들이 버텨냈던 것을 우리도 그대로 답습하여 오늘을 버티고 있다. 장사만은 하지 않길 바랬던 나의 부모 바람과는 다르게 나도 장사치가 되었고 한 술 더떠 장사하는 사람들을 돕는 사람이 되었다. 아무렴 어떤가. 엄마가 넓적한 족발다리에서 서억서억 살코기만 다 발라내어 남의 접시에 내어가고 나면 그 뒤에 꼬투리 고기만 간신히 붙은 뼈를 연신 갉아먹던 어린 시절의 내가 이제 족발 대짜는 아무렇지도 않게 처억하고 시켜 먹을 수 있다. 내 장사 노하우를 적잖이 탐내하는 점주들도 있다. 내가 필요한 곳이 있으면 그걸로 된 거 아닌가. 나는 내 부모의 바람대로 앞가림은 하고 남의 손 벌리지 않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그럼 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