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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혜령 Jul 17. 2019

퇴사할 때의 필수 아이템:작은 공동체


오로지 내가 살기 위해, 대책없이도 회사를 그만둬야 할 때가 있다.

그 때 안전 낙하를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이 있을까? 

우선 카드비용 줄이기(이것은 최소 6개월 전부터는 시작해야 한다), 큰 돈이 들어가는 배움(정기적으로 들어오는 돈이 없으면 배우고 싶어도 못 배운다), 1년은 먹고 살 수 있는 저금, 건강검진 (자기 돈 내고는 하기 힘들다), 마이너스 통장(백수와 회사원이 받을 수 있는 대출규모가 다름. 이건 지인이 알려준 팁) 등등. 어이쿠, 그냥 떠오른 것만 적었는데도 생각보다 많다. 


이 외 머스트 해브 아이템은 ‘내가 나로써 속할 수 있는 작은 공동체’이다. 

이는 나를 사회와 연결시켜주는 일종의 ‘정서적 안전망’ 역할을 해준다.

삶이 크게 요동치는 변형기에는 안전한 공간이 필요한 법이다. 가장 먼저 찾아야 할 것이 인간 아무개 씨로서의 나의 정체성. 회사의 이름과 사회적 지위로 설명되던 나의 모든 능력은 갑자기 사라지고, 새삼스러이 증명해야 할 것이 되어 버린다. 


 자신을 새롭게 설명하고 정의할 서사가 필요하지만 그것이 당장 준비되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알면서도 어렵긴 하다), 이 점이 퇴사 후 가장 먼저 고민해야 할 주제가 된다. 이 작업을 바탕으로 새로운 경제적 시스템을 설계하기도 하니 아주 중요한 과정이다. 반면 이 작업을 못하면 나이 70이 되어서도 ‘XX회사 퇴사’와 같은 몇 십년 전의 과거로만 현재의 자기를 설명한다. 끔찍하지 않은가. 


 지금까지 균형을 이루어왔던 삶의 저울에서, 무게 중심을 잃고 크게 기우뚱하며 요동칠 수 밖에 없는 변형기. 이 혼란의 시기에는 과거와 상관없이 현재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주고 지지하며 함께 미래를 고민하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여기에서 휘청임을 멈추고 ‘그라운딩’ 하며 다시 세상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면? 가장 먼저 ‘작은 공동체’부터 찾아두라. 

그런 곳은 ‘롤링다이스’ 의 조합원 이소연 님의 말을 빌자면 “내 상태의 변화가 이들로부터 환대받을 권리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으며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길 원하고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환대를 주고 받는 데 다른 자격은 필요 없”는 곳이다. 


+덧붙임 1. 

문득 궁금해졌다. 롤링다이스와 같은 모임은 예전부터 존재했을 것이다. 당시 나는 이런 모임이 필요했는데 왜 찾지 못 했을까?

 첫째 써치 툴이 옳지 않았다. 대개 그런 모임들은 페이스북을 통해 소통하는 데 나는 페북을 하지 않았으므로. 둘째 세계관의 문제, 사실 이는 믿음의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오랜 회사생활을 통해 세상은 정글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적대적이고 경쟁적인 관계로 환경과 타자를 인식했다는 뜻이다. 


<힘빼기의 기술> 중 <유고, 위 해브 어 카>에피소드에는 이와 반대되는 얘기가 나온다.

스페인으로 여행을 간 저자와 친구들은 복잡한 어느 도로를 운전하다가 길을 잃는다. 영어가 통하지 않고 스페인어는 아무도 하지 못하는 상황. 결국 한 친구가 내려서 손짓발짓으로 로컬 택시 운전사와 소통을 하고, 그 택시를 따라 운전함으로써 무사히 혼잡한 도로를 빠져나온다. 저자는 그게 가능했던 이유로, 그 친구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따뜻하고, 선의로 가득할 것’인데 ‘그건 이 사람이 그렇게 믿기 때문이고, 그보다 먼저 스스로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임을 꼽는다.  


그렇다면 내 앞에 구현되는 세상은 회사를 빠져나오고도 여전히 정글이었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믿었으니까. 그러므로, ‘페북을 했어도 못 발견했을 것이다’에 쓰라린 한 표. ㅠ.ㅠ


+덧붙임 2 

비슷한 백그라운드를 가진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적당히 벌고 잘 살기>를 고민하는 모임에는 속하지 못했으나, 되짚어보니 타로카드 공부 모임이 나에게 ‘정서적 안전망’ 역할을 해주었던 것 같다. 그 모임의 구성원들이 심리공부를 하며 자기를 이해하고 들여다보고자 애쓰는 사람들이라 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입으로 얘기하지 않는 한, 각자의 과거를 묻지 않았고 보여주는 이상 들여다 보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함부로 위로하려 들지도 않았는데 나는 그 거리감이 좋았다. 


 그들이 나의 현재 모습만으로 미래의 가능성을 격려했기에, 오히려 학교나 회사에 속해 있을 때보다 나 자신에 대해 긍정적으로 볼 수 있었다.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내가 이 집단을 기반으로 새로운 경제 공동체를 만들고 기꺼이 협력하고자 하는 이유는. 나 또한 이 곳의 누군가에게 ‘안전망’이 되어주고 싶다. 그럼으로써 나의 세상에 대한 믿음을 바꾸어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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