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사랑! 그래야만 하는가!
이혼을 요구하며 위자료를 주겠다는 프란츠에게 그의 아내는 말한다.
"내게 돈은 중요하지 않아"
"그러면 뭐가 중요하지?"
"사랑."
"사랑이라고?"
"사랑은 전부야
나는 오랫동안 싸울 거야
끝까지, "
아내의 사랑이라는 단어에 프란츠는 아무 의미도 찾지 못하고
이별을 고하고, 다른 여자에게 간다. 하지만 불륜에서 결혼으로 카드를 꺼낸 프란츠에게
그의 연인 사비나는 두려움을 느끼고 떠난다. 혼자 남은 프란츠에게 또 새로운 사랑이 찾아오지만 아내는 이혼을 해주지 않는다. 그렇개 살다 프란츠는 죽는다. 어느 여정길에서......
다른 여인과 살던 프린츠가 어느 날 주검으로 돌아오자,
마침내 프란츠는 법적 주인인 아내의 손에 들어간다.
남편의 장례식이 결국 그녀의 진정한 결혼식이 된다.
자기 삶의 끝매듭 모든 고통의 보상.
이미 자신에게 마음이 떠난
이런 사랑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아내에게 이런 무거운
집착과 신념 같은 이런 사랑은
자신이 지금껏 살아온 삶의 전부이다.
자신을 증명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안에는 토마시와 프란츠 두 부부와 사비나라는 한 여자의 사랑이야기가 나온다. 두 남자 모두에게 속하지만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사비나라는 여인을 중심으로 이 소설을 읽었다.
소설 속 네 명의 주인공들의 사랑이야기는 남녀의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삶 이야기이다.
많은 평론가와 일반 사람들에게서 회자되어 입에 오르내리지면서 찬사와 함께 읽혔지만.
이십 대에 나는 오로지
침을 꼴딱 넘기면서 성애 장면에만 몰입하는데 정신이 빼앗겼고,
삼십 대에는 어렴풋이 남자를 이해해보겠다고 200명과 잤다는 토마시의 여성편력을
다시 들추어내 보았지만,
영화 속 다니엘 루이 데이스의 멋진 얼굴만 떠오르고 쿤데라의 내면은 읽히지 않았다.
인생의 의미 속에 사랑이 가벼워야 하는가!
아니면 무거워야 하는가?
이 책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네 명의 주인공이 격변하는 시대 속 프라하의 공산주의 정권 속에서 서로 사랑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로
주인공들의 내면의 이야기들을 작가가 대변하듯이
엮어진다. 소설이기는 해도 마치 철학책을 읽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뒤죽박죽 이야기가 되풀이해서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그냥 읽을만하다.
밀란 쿤데라는 프라하의 봄을 그대로 겪은 사람이다. 소련의 잔혹한 통치를 온몸으로 느낀 사람이다. 시대적 아픔 속에서 작가는 등장인물을 통해 인간의 모든 뾰족한 모서리들로 서로를 찌르게 하고 서로 아프고 상처 받게 하며 주인공들을 둥근 곡선으로 변화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쿤데라의 인물들은 성숙하다. 뾰족함을 깎는 소설적 기법이 뛰어나다.
순수 함조 차도 깊은 성찰이 있다.
네 명의 주인공인 가벼움 토마시와 사비나
무거움의 테레자와 프란츠!
토마시가 쿤데라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한마디로 쿤데라는 한때 좀 많이 놀아 본 아저씨 같다.
먼저 프란츠와 사비나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유부남인
프란츠는 스위스의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면서 체코에서 스위스로 망명한 아름다운 여인 사비나에게 매료된다. 순탄한 삶을 살아온 그에게 공산주의 나라에서 반체 재인사로 느껴지는 사비나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사비나는 어린 시절부터 공산주의 체제 속 억압된 이념을 거부하며
배신을 꿈꾸며 살아간다. 아버지의 기대를 배신하고 화가가 된 그녀는 언제나 한 사람에게 머물지 못하고 남녀관계에 에로틱한 우정만을 추구하며 권태가 찾아오면 배신을 거듭하며 가벼운 삶을 추구한다.
반면 프란츠는 어머니의 사랑과 같은 아내의 사랑에 감동해서
결혼하지만 책임과 의무만 강요하는 아내에게 벗어나려 한다. 성실한 가장으로써 명석한 두뇌와
잘생긴 외모의 지성을 갖춘 남자이다. 프란츠와 사비나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성향과 가치관을 가졌다. 정답이 있는 무거운 진리 속에 사는 프란츠와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가벼운 유희 속에 있는 사비나.
비밀이 없는 프란츠와 모든 것이 비밀인 사비나!
사비나는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참모습을 모른다 사적인 삶과 공적인 삶에 구분이 없는 깨꿋한 사람들은 타인을 의식하기 때문에 결국은 그 속을 모르는 것이다.
사비나와의 대화에서 뇌 속에 맴도는 구절은.
"앞은 파악할 수 있는
거짓이고,
뒤는 이해할 수 없는
진리였지"라는 통찰이다.
사비나의 말처럼 우리는 어떤 상황 어떤 공동체 어떤 타인에 의해 변하는 것이 우리라면
우리의 기준은 무엇이 되며 옳고 그름은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이건 단지 종교나 윤리 도덕적 규범이 아닌 개개인의 선택인지 모른다. 하지만 프란츠는 이 모든 걸 자신의 규범 속에 넣고서 사비나를 사랑하고 집착한다. 이런 남자가 빠지는 늪은 허무이다.
허무를 채울 수 있는 건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더욱 그 의미 속 사비나에 대한 집착을 만든다.
가벼움과 무거움이 이해되지 못한 채.
프란츠가 이혼을 결심하고 사비나와 새 삶을 약속하자.
사비나는 한마디 말도 없이
프란츠를 떠난다.
사비나에게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
본문 구절 발췌-------
"사비나의 울적한 상념은
계속되었다.
만약 그녀에게 명령을
내리는 어떤 남자가
있다면?
누가 그녀를 지배하려 들었다면?
얼마 동안이나 그녀는
그것을 참아 낼 수 있었을까? 채 오분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어떤 남자도 그녀에게는 적당치 않다.
강한 남자나 허약한
남자 모두.
"당신 힘을 가끔 내게 쓰지 않는 이유가 뭐야?"
"사랑한다는 것은 힘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지."라고 프란츠가 부드럽게 말했다.
사비나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첫째, 이 말은 아름답고 진실하다.
둘째, 이 말 때문에 프란츠는 그녀의 에로틱한 삶에서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그녀에게는 "키치"라는 망령이 늘 그녀의 가벼움을 부추기고 있었다.
"키치"라는 단어는 독일어로써 똥을 부정하고 표면적인 미학을 추구하는 단어이다. 키치는 정답을 강요하는 전체주의 사회 안에서 이쁘게 포장되어
모든 인간 사이의 유대 감안으로 파고들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사비나의 첫 번째 내면적 저항은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미학적인 성격을 지녔다.
그녀에게 혐오감을 일으켰던 것은 공산주의 세계의 추함이 아니라 공산주의가 뒤집어쓰고 있는 아름다움의 가면이었다. 달리 말하면 공산주의라는 키치였다.
사비나는 프란츠가 자신으로 부터추구하는 이 표면적 키치적 삶에서 도망친 것이다.
혼자 남은 프란츠도
몇 년 후 캄보디아에서 허무하게
강도를 당해 죽는다.
사비나는 배신의 끝을 향해 남은 인생을 쓸쓸히 살아가지만.
자신의 삶을 긍정할 수는 없다.
결국 자신이 그토록 부정하는 키치적 삶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스스로 가 원하던 삶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모순에 부딪치고 만다.
그녀는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고 그 끝은 결국 허무였다.
가벼움 뒤의 무거움을 껴안지 못한 삶은 결국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한다.
소설은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이야기하면서 시작한다. 한 번이라고 여기는 이 삶이 여러 번 영원히 반복될 꺼라니 삶은 잔인한 형벌이란 말인가,
또한 이 일회성인 삶에 권태 놔 허무를 상징하는 프란츠와 토마시라는 두 남자의
전혀 다른 사랑의 방식들! 토마시는
수많은 여자와 육체적 쾌락을 채우며 권태를 해소하지만 진정한 사랑의 의미는 부정한다. 반면 프란츠는 사랑의
허무를 채우려고 진정한 사랑의 대상인 한 여자에게 집착하지만, 프란츠 또한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다.
권태를 해소하면서 자유롭고 편안한 삶을 살아가는 토마시에게
진정한 사랑이란 여러모로 참기 힘들고 불안하고 견딜 수 없는 행위였고
허무를 채우려고 사랑하는 이를 숭배의 대상으로 여기는 프란츠 역시
사랑하는 대상을 이해하고 그 가벼움 너머의 사랑은 보지 못했다.
가벼움을 추구했던 토마시는 결국 무거운 사랑으로 자신 곁에서 헌신하는 테레자를
통해서 무거움 속에서 서서히 자신을 변화시켜간다.
하지만 무거운 사랑을 했던 프란츠는 사비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소유하려고만 했으니
또 다른 허무만을 더 끌어안은 셈이다.
무겁디 무거운 인생을 살아온
테 리자의 삶은 어머니의 불행에서 시작되었다.
잘못된 결혼을 딸에게서 보상받으려는 엄마는 딸에게 헌신을 강요했다.
헌신이 세상의 모든 덕목인 것처럼.....
그렇게 무거운 사랑만을 본능적으로 배우게 된 것이다.
우리 모두는 대체적으로로 테레자의 삶과 여러모로 닮아있다.
난 사비나처럼 살고 싶었다.
사비나처럼 될 수 없기에
사비나의 배반과 가벼움을 이해하고 싶었다.
사비나가 키치를 부정하는 내면 속에 동참하고 싶었다.
배 신속 반복되는 삶 자체인 사비나지만 결국 아무것도 배신할 게 없는 마지막 순간은 두렵기만 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결구는 네 남녀 중에서 그녀 혼자만 이 소설에서 생존한다. 프란츠는 염원하는 봉사단체의 대장정길에서 강도를 당해 죽고. 토마시의 여성편력은 시골마을에서 끝이 나지만 몸과 마음을 함께하는 행복을 만끽하는 둘만의 행복한 중년의 어느 날 교통사고로 테레자와 영원히 함께 눈을 감는다.
유럽 남녀의 도식적인 연애관에는 허무와 권태를 깔고 가는 염세주의식
사고를 느끼게 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가장 큰 매력은 작가의 사변이다.
서사는 앙상하고 매 스토리마다 인물들의 이야기와 행동 말들에 버물려서 쿤데라는 끝없는 의미의 퍼즐 맞추기를 한다. 작가가 살아온 모든 삷의 방식을 끄집어내 와서
주인공 네 명의 인생을 대변하면서 그 어느 인물에게서도 쿤데라는 본질을 보려고 메스를 들이댄다.
역사와 정치 종교와 사랑 대화와 섹스 안에서도 의미와 무의미라는 주제를 파고든다.
쿤데라는
인생이라는 생방송에서 밑그림조차 그려지지 않은 각본을 들고 와서 삶을 견뎌내는 주인공들 그려낸다
"나에게 전부인 이 사랑이 너에게는 내가 전부가 아닐 때 "모든 관계의 문제는 이 작은 모순에서 시작된다.
나 또한 왜 그가 전 부여야만 하는가! 스스로의 틀 안에 관계의 모순을 가둔다.
이 작은 모순은 그 누구의 잘못으로 떠 넘길 수도 없다.
테레자가 스스로 이 모순적 사랑에
자신의 인생을 바쳐버린 건
어쩌면 신부 상승을 꿈꾸면서 어머니의 비참한 삶에서 벗어나고픈 열망에서 시작되었다.
우연히 자신이 웨이트리스로 일하던 술집에서 손님으로 온 유능한 외과 의사인 토마시에게 자신을 인생을
걸어 버린다.
해필 자신이 좋아하는 베토벤의 음악이 흐를 때 그가 나타났고 테이블에는 책이 놓여있었고. 그 우연은 운명이 된다
애정 없는 여자와 이혼한 후 자식과 가족을 등진채 사랑 없는 육체적 탐닉만을 여자에게서 채우면서
에로틱한 우정만을 바란던 토마시의 인생에 테레자라는 여자가 자신의 순결을 건 조건 없는 그녀의 사랑에 자연스레 빠져서 그녀를 사랑하게 되지만
몸과 마음의 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결혼 후에도 끊임없이 다른 여자들과 육체를 탐닉한다.
토마시가 에로틱한 사랑과 시적 언어의 사랑을 구분해서 테레자에게 자신의 전부를 주지 않은 것이
가벼움과 무거움이라면 쿤데라는 그 어느 쪽이 더 가치 있는 삶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주인공 모두 삶의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며 모든 행동과 생각의 이유가 존재하고 가벼움과 무거움을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며 살아간다.
관계의 문제의 시작이 가벼움과 무거움의 사이의 모순이 그 누구의 질못도 아닌 자신의 선택이라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가장 먼저 놓아야 할 것은
" 너를 사랑하는 만큼 나를 사랑해줘" 하는 것이다.
이 단순하지만 큰 바람이 테레자를 절망으로 이끌었고 토마시를 갈등 속으로 끌어들였다.
전혀 다른 무거움과 가벼움이 만나
서로를 사랑하지만 가벼움과 무거움은 이해되지 못한다.
우리 각자의 고유성은 사랑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모두 다르다.
그 차이를 분명히 알면서도 내가 사랑한 만큼 사랑받기를 끊임없이 원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관계에서 상처 받으면서도
또 그다음 관계에서 또 그런 자신만의 사랑의 방식의 잣대를 갖다 대고야 만다.
결코 변화되지 않은 그 고유 성안에서 우리들의 갈등은 반복된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서로의 고유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힘든 명제인 것 같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는 자신의 고유성대로 자신의 인생을 살지 못한다. 어쩌면 스스로의 고유성을 아예 알지도 못한 채 살아간다. 자신의 고유성을 알지 못하고 어떻게 타인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을 아는 것에 평생을 바친 다해도
알 수없는 게 우리들 자신이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 속 인간의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지만
소설 속 또 다른 주인공 강아지인 카레닌은 원운동을 하면서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도 가벼운 시간을 살고 있다.
테레자는 자신의 강아지 카레닌을 향해 조건 없는 사랑을 한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카레닌에게서 완성한다.
바로 카레닌의 고유성을 완전히
받아들였기에....
카레닌의 고유성은 연약함이다.
카레닌은 시곗바늘처럼 원운동을 하면서도 권태가 아닌
한결같은 순종. 나의 손길에 반응해주는 배신도 없고 허무도 없는
변함없는 순환운동의 생명체이다.
카레닌은
테레자가 절망의 순간마다 버티는 힘이 된다. 나보다 더 연약한 존재가
나의 손길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우리 존재의 의미는 나를 필요로 하는 대상이 있어 나의 무거움과 가벼움의 무게를 실감하게 한다.
카레닌을 향한 테레자의 본문의 글로
끝맺을을 해본다.
즐거움과 애정을 불러일으키는 현상은 어떻게 된 것인가? 그 대답 은
내게는 단순한 것 같다. 개는 한 번도 낙원에서 추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레닌은 육체와 영혼의 이원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리고 구역질이 무엇 인가도 모른다. 그 때문에 테레사는 카레닌과 함께
있으면 자신이 그토록 편안하고 안심이 됨을 느낀다. 그녀를 카레닌과 연결시키고 있는 사랑은 그녀와
토마스 간에 있는 사랑보다 더 낫다고 생각된 것이다. 테레사는 그 책임을
자신에게도, 토마스에게도 전가시키려 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기들이 서로
가 더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주장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에게는 인간 남녀의 쌍은 그들의 사랑이 최선의 경우에도 사람과 개
간의 사랑보다 선천 적으 로 더 나쁘도록 창조되었다고 생각된다. 인류의
역사에서 이 특이한 현상은 아 마도 창조에 의해 계획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테레사는 카레닌으로부터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사랑까지도 그녀는 한 번도 카레닌으로부터 요구하지
않는다. 인간 남녀의 쌍들을 괴롭히는 질문을 그녀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가 나를 사랑하는가? 그 가 나보다 어느 다른 누구를 더 사랑했는가?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그 는 나를 사랑할까?라는 질문들 말이다.
사랑을 문제 삼고, 사랑을 측정하고 탐사하며, 사랑을 조사해 보고
심문하는 이들 질문은 모두가 사랑이 이미 싹도 트기 전에 그것을
질식시켜 버린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사랑할 수 없다는 것도 가 능한
말이다. 바로 그 이유는 우리가 사랑받기를 갈구하기 때문이다. 다실 말하
면 우리는 아무 요구도 없이 다른 사람에게로 다가가 그의 현존 이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대신 다른 사람으로부터 무엇인가를(사랑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면이 있다. 테레사는 카레닌을 있는 그대로
수락했다. 그녀는 카레닌을 그녀의 형상에 따라 변경시키고자 하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카레 닌이 지닌 개의 세계에 동의했고, 이
세계를 그것으로부터 뺏지 않으려 했다. 그 녀는 그것이 지닌 숨은 성향에
질투하지 않았다. 그녀가 카레닌을 교육한 것은 변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남편은 부인을, 또 부인은 남편을 변화시키려 한다) 서로가
이해하고 함께 살 수 있도록 하는 기본적 언어를 그것이 익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또, 개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자발적인 것이다.
아무도 그녀가 그렇게 하도록 강요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