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은 꼭 내릴 때가 가까워질 때쯤에 졸음이 밀려온다.
그때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잠에 잠깐 빠진다. 기억이 뒤 섞인 찰나 같은 꿈을
꾸면서 정신이 들면 내려야 할 정거장이 된다. 마음이 줄다리기를 하며 엉덩이를 붙이며
속삭이다.
"출근 따위 좀 늦으면 어때? 이 달콤함 꿀잠을 한 시간 정도 자고 나도 세상은 어떻게 되지 않아"
이대로 잠이 깰 때까지 쭈욱 가는 거야.... 내리기 싫다 내리기 싫다.. 일 따위 알게 뭐람 늦게 출근하면
뭐 어때? 그냥 이대로 앉아서 내리지 말고 자는 거야. 잠이 깰 때까지 자보는 거야.
악마의 유혹은 자동문이 열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순간 사라진다.
출근하는 사람들의 틈새에 끼어 지하철을 빠져나오면서 나른한 몸은 발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에
함께 동화되어 거리를 걷는다. 아직은 문 닫은 가계들이 즐비한 상가를 지날 때면
이제 막 빵을 굽기 시작하는 베이커리 카페를 지나 친다.
오전 9시 50분
재즈음악은 나른하고 직원들은 분주하지만 카페 안은 손님이 없고, 편안한 테이블에 푹신한 의자가
나를 유혹한다.
" 혼자서 차를 한잔하고 갈까? 이넓은 홀을 혼자 다 즐길 수 있는 시간은 지금 뿐이야.
한 시간만 앉아서 즐기다 갈까?"
물끄러미 통유리 안 카페를 구경하다. 다시 지나친다.
신호등을 건너면 찐빵가계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김들이 연기처럼 피어올라 만두와 찐빵 앞에 선다.
아침을 먹고 나왔는데도...
" 몇 개 사서 먹을까? 먹음직한데... 지금 먹고 점심을 건너뛰지 뭐...."
하지만 지나친다. 몇 블록을 지나자.. 은은한 꽃향기가 퍼진다. 백합인지 장미인지.... 꽃가게 꽃다발은
오늘따라 사랑을 고백하기 좋은 포장지에 탐스럽게 싸여 있다.
"기분전환 겸 꽃 한 다발 사서 자리에 꽂아 둘까? 아니면 차대리 책상에 놓아둘까? 이걸 보면 아침부터 미친 듯이 좋아할 텐데.." 머리를 흔든다.
사무실건물을 한번 올려다보면서 꽃집을 지나친다.
커피 향 가득한 테이크아웃 커피점 앞에 선다. 이 집은 늘 인기가 많다. 오늘따라 줄이 많다.
그냥 봉지 커피나 마시지 뭐, 또 지나친다. 이제 오픈을 준비하는 옷가게를 지나치는데,
새로 진열하는 옷들이 이제
봄단장을 하기 시작한다.
겨울의 끝자락에 입기 좋은 원피스하나에 세일 딱지가 눈에 들어온다.
" 좀 기다렸다가, 저 옷을 구경하고 가야겠다. 몇 분 남았지... 아직 십 분이나 남았네..
어떡하지..."
조금 망설이다 다시 지나친다.
아! 오늘 출근길도 유난히 험난하다. 지나가는 곳곳이 지뢰 밭이다.
아직도 5분을 더 걸어야 하는데.... 이 아침에 나를 유혹하는 것들은 휘황 찬란하다.
유혹! 선택의 갈림길은 유혹을 즐기는 순간이다. 유혹당하지 않는 짜릿함을 즐기는 찰나의 순간.
우유부단한 감정의 유희. 자유에 저당 잡힌 일상의 장벽.
자잘한 유혹 따위 통과하고, 그냥 통 크게 하루를 째버리고 춘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을 자유.
시계추처럼 하루를 타이트하게 사는 셀러리맨에게는 없는 자유.
아무 할 일이 없이 눈 뜬 백수에게는 없는 구속된 얽매임.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출근지옥행 사람들 틈에서 지각행 티켓을 받지 않기 위해 뛰는 사람들.
유혹당할 빈틈조차 없는 사람들.
삶이 여유로워 아침이 시작되면 오늘 하루 또 뭘 하면 지낼지 고민해야 하는 사람들.
유혹당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
하지만 이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이 유혹. 우리를 설렘에 빠지게 하는 유혹은
자유와 얽매임의 탱탱한 밧줄사이를 흔들리듯 걷는다.
유혹을 견뎌낸 자의 짜릿함.
유혹에 이끌려, 누군가의 전화를 기다리고, 누군가의 문자를 기다리고,
기다림 속에는 유혹하고, 유혹을 견디어내는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마력이 숨겨져 있다.
이 지루한 일상에 유혹마저 없다면, 유혹에 흔들리는 마음마저 없다면,
유혹을 견뎌내는 마음마저 없다면, 삶은 시간의 노예처럼 그저 흘러갈 뿐이다.
무엇을 유혹하고 무엇에 유혹당할지 오늘도 사악한 미소를 짓는
내 안의 악마를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