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하는 무의식의 세계(끝)

두려움의 근원을 찾아서.

by 토끼

7남매의 막내라서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냐고요?

무슨 소릴 그렇게 하세요. 가난한 대가족집 7 남매 막내는 응성받이로 자랄 수 없어요.

제가 초등하고 입학할 무렵 부모님 나이가 이미 쉰이 넘으셨다고요.

희끗희끗한 흰머리를 한 엄마의 손을 잡고, 입학하던 날

그때 처음 알았죠. 젊고 예쁜 다른 엄마들을 보면서,

그날따라

엄마의 등이 조금 더 굽었고,

어물전 생선비린내에 찌든 엄마의 손은 몹시도 검고 투박하며, 축축하고 뜨거웠다는 걸요.

그날 엄마는 내 입학식 때문에 장사를 쉬고, 처음으로 화장을 하고

불편한 삐딱 구두를 신고, 고운 양장을 입으셨죠. 햇볕에 탄 거무튀튀한 얼굴에

하얀 분가루가 어린 내가 봐도 어찌나 어색하던지....


근데 엄마의 치맛단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흰 속치마단 때문에

어린것이 뭘 안다고, 그 치맛단 때문에

창피하기도 하고, 가슴이 미어지게 짠하기도 하고,

그때 작은 고사리손으로 엄마의 손을 힘주어 잡았어요. 엄마는 내가 긴장을 했다고 생각했는지

내 바지단을 한번 접어 신발을 보이게 하고

옷매무새를 잡아 주셨죠.

지금도 선명한 기억의 느낌들....


그날 내머리 속을 떠다녔던 건 예쁜 선생님 얼굴도 아니었고,

코찔찔이 남자 짝꿍도 아니라

엄마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속 다짐이었어요.

내 입학식은 그렇게 조숙한 어린아이의 탄생을 예고했답니다.



늦둥이의 설움은 언제나 혼자라는 거예요.

티격태격 싸울만한 대상이 없고, 형제자매는 커서 모두 자기들끼리의 유대감이 있는데..

나만 어린아이잖아요. 아무도 어린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고민이 있는지

신경 안 써요. 그냥 어린아이는 어리다고만 생각하죠.

난 그래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모든 걸 처리해야 했어요.

엄마는 자랑처럼 사람들에게 내 얘길했죠.

어릴 때부터

칭얼대지도 않고, 혼자 두어도 잘 놀고,

손이 안 가는 하는 착한 아이였다 고요.




가끔 명상을 하면서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본다. 늘 북적이는 식구들 틈에서 자랐기 때문에

외로울 틈은 없었는데... 언제나 뭔가 다르다는 혼자만의 고립감이 있었다.

그 다름 속에서 하는 질문 들이 있었다.

"사람들도 내가 하는 생각들을 할까?" 하는

하지만 이런 내 질문에 관심을 가져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식구들은 언제나 먹고 사는 걱정뿐이었고

그때 어린 나를 늘 긴장시켰던 건 몸이 아픈 아빠와 아버지를 대신해 장사를 하던 엄마가 아프면 어쩌나! 일찍 돌아가시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었다.


잠들어 있는 아빠가 영영 눈을 뜰 것 같지 않아.

가만히 흔들어 깨웠던 유년기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이런 나의 무의식은 겹겹이 쌓

여, 죽음이라는 두려움을 잉태하고 있었다.


그때 사고의 후유증이 외상후 스트레스로 이어졌다.

그당시에는 그 증상이 공황장애인 줄도 몰랐다.


내 감정에 무지해서 온몸으로 저항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난 어쩌면 죽을지도 몰라. 하면서,

하지만 한번 두려움에 저항하면 감정은

다른 두려운 감정하나를 더 달고서 다음에 나를 찾아온다.

그런 상황이 반복되면 의식은 점점 두려움에 나를 내어주고,

무의식은 두렵지 않은 상황에서도 불안의 감정을 몰고 온다.



이때 두려움을 느끼는

현재의 자아가 나의 전체 자아인줄

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내 기억속 자아 였다.


그렇다면

자아와 의식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


먼저 내가 정의하는 자의식과 무의식은 이렇다.

이것은 단순히 내가 가진 지식과 경험에서 쓴 글일 뿐이다.



인간의 의식은 어떻게 생겨 나게 되었을까?


인간의 의식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내가 읽은 책중에서 줄리언 제인스의

의식의 기원이란 책이 있다.

인간의 의식은 언어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다.


줄리언 제인스는

언어가 없었던 원시사회에서 인류는 오랫동안 의식을 갖지 않은 채 살아왔으며

그때 인간은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옛 인류는 신의 음성을 들었고 그때부터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언어적 환각이라는 과정을

통해 의식이 점점 언어와 함께 선명해지고, 의식의 진화로 인해 인간에게 더 이상

신의 음성이 들리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이것을 두고 그녀는 양원적 정신이라고 부른다.


이 책은 두껍기도 하고, 굉장히 어려워서 완독 하는데 2년 정도 걸렸지만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건너뛰고 읽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내 이해도에 따라 지금 읽는다면

다르게 해석 될 수 있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이런 질문이 들었다.

양원적 정신구조에서 들렸던 신의 음성은 무의식에서 들렸단 말인가!

그러면 의식이전에 무의식이 선명하게 인간의 의식을 지배했던가!



인간의 의식은 수많은 감정과 습관을 만든다.

컴퓨터 자판을 치기 위해 수많은 연습과 연습을 의식적으로 하고,

어느 순간 무의식적으로 자판을 치고 있는 나를 보면서

무의식 속에 저장습관은 의식하지도 않고, 저절로 나온다.

또한 수많은 감정 또한 습관처럼 의식의 바닥에 각인되어

의식하지 않아도, 무의식 속에서 감정이 튀어나온다.

스트레스는 이런 무의식적인 습관에 가깝다



. 양원적 정신구조의 핵심은

언어가 갖고 있는 은유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언어를 쓸 때가 있다.


예를 들면 , 이런 표현이다.


난 네가 없으면 죽을 것 같아라고,

남자가 고백할 때

여자가 말한다.


정말 그럴까?


정말 그럴까 라는 말을 하고 나서 그 말속에 담긴 많은 생각과 맥락을

자신조차도 모를 때가 있다.

그것은 마치 내가 아닌 타인의 소리를 빌려 내가 한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하나의 언어 안에 설명하지도 않아도 많은 감정과 느낌을

담고 은유와 상징이 담기지만 풀어서 설명하면 그 의미를 다 전달하기 힘들 때

그저 그 말자체로 그냥 두기도 한다.




언어가 없던 원시사회에서 신의 음성을 어떻게 들었느냐 하는 것도 의문이다.

느낌으로 신의 음성을 듣는 건가!

직관 혹은 느낌은 무의식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신호이다.

언어나 생각이전 느낌이 먼저 우리의 감각을 통해 전해 오기도 한다.



건강한 의식의 흐름을 가진 사람을 나라고 가정한다.

흔히 어떤 일을 당하면 감정이 먼저 일어난다고 하는데

감정은 가장 마지막 단계에서 일어난다.



생각은 전두엽의 작용으로 생각은 생각으로 바꿀 수 있다.

하지만 감정은 생각으로 제어가 안된다.


심장이 이유없이 두근거리고

장기들에 변화가 생기면

뇌는 이상황을 빨리수습하려고

감정을 만들어 낸다

이때 감정에 저항하거나 부정하면

몸은 통증을 수반한다.


그러니까.

최선의 방법은

그저 감정이 몸안에서 통과하기를

기다려야 한다.

이때 기다림의 시간을 줄일 수 있는것이 바로

온전히 받아들이기이다.



몸이 릴랙스 되어 있을 때는 불안이 없다.

몸에 의해서 감정이 찾아오고 불안이 생긴다.


내가 느끼는 감정의 과정은 이렇다,


거리를 걷는데 자동차가 나에게 돌진하고 있다

가장 먼저 그 어떤 생각이 들기도 전에 내 몸이 먼저 경직된다.

그때 편도체가 활성화된다.

감정보다 직관보다 먼저 내 몸은 준비를 한다.

경직은 도망가기 위한 하나의 근육의 준비단계이다.

그다음 위험하다는 느낌이 들고,

그러면 뇌는 생각을 한다.

그때 전두엽피질이 작동한다.

어느 쪽으로 피할 것인가 이대로 죽을 것인가!

그다음 감정이 올라온다.


내가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감정은

죽을 만큼 강력하기도 하고, 때로는 침착한 감정이 들기도 한다. 그 감정의 강도에 따라

침착하게 내 동작의 행동 변화가 일어난다.




무의식을 관장하는 뇌는 편도체의 영역이다.

그런데 이런 건강한 신호체계가 무너지면, 의학적으로 자율신경계가 무너지게 된다.

아무런 방어기제가 작동하지 않고 순서도 지켜지지 않으면서 무의식적으로

감정이 먼저 올라온다. 위험하지도 않은 상황에서도 무의식이 발동한다.

그러면 이런 무의식을 제어할 방법은

바로, 이성적으로 알아차림이라는 자아가 깨어 있어야 한다.


이 자아가 하는 역할은 다음과 같다.



여기 물컵이 있다.

물을 마시기 위해 컵을 들고 있다.

물을 마시기 위해 먼저

갈증을 느끼는 본능의 자아가 있다.

물을 마시는 지금 경험하는 자아가 있다.

차가운 물이 목으로 넘어갈 때

물의 기억을 가진 자아가

시원함을 느낀다

바로 기억 속의 자아이다.

하지만 이 모든 자아들을 알아차리는 자아가 있다.


모든 행동. 감정, 관찰하고, 알아차리는 자아는 참나 일 수도 있고,

다른 나일 수도 있다.




나라는 의식은 자아의 실체이다.

하지만 내가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수많은 자아들이 모여서 운명 공동체의 삶을 함께 살고 있다.

지금 내가 불안이라는 감정을 느낀다면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지금 불안을 느끼는 자아는 누구인가.

기억 속의 자아인가 아니면 지금 경험하고 있는 자아인가?

당연히 과거의 기억 속의 자아이다.


무의식은 정화는

과거의 기억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재해석해서

지금의 자아에게 이해시켜야 한다.



이런 과정은 아마도 죽을 때까지 되풀이되겠지만

나를 알아가는 과정 속에서 또 새롭게 만나는 재미일지 모른다.


나를 만나는 시간에

어린 나를 만난다.


그래서 부모님 걱정까지 짊어 졌던

어린 그때의 넌 힘들었었니?


아니 난 부모님에게 하나의 기쁨이었다는

내가 자랑스러워


그런데 지금의 난 왜 니가 불쌍하고

안스러운 걸까?


어린 내가 대답한다.


나를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타인들도

더 깊이

시랑할 수 있어. 넌 스스로를

좀 더 사랑해야 해!


나는 대답하지 못한다.


나 아직도 어린 니가 했던 그 사랑안에서

헤메이는 거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