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erey / Guanajuato / Guatemala City
남미 원주민 중에서는 무거운 짐승의 고기를 먹으면 그 짐승처럼 둔해지고 민첩성을 잃는다고 믿어, 새와 작은 동물 등 빠르고 가벼운 고기만을 잡아먹고 사는 부족이 있다고 한다. 과달라하라의 호스텔에서 일한 몇 달 동안, 나는 오래전에 이 땅에 살았을 그 부족처럼 가볍게 먹고 가벼운 생각들만 하며 지냈다.
뉴욕에서 잘 나가는 레스토랑 매니저이자 프리랜서 에디터로 일하다 남미 땅으로 넘어와 요가를 공부하고 있는 레이첼 언니에게 건강하게 채식 하는 법도 배웠다. ‘이 한 몸 다 바쳐 열심히’ 만이 답이라는 생각 속, 무리를 일삼던 몸과 마음이 그동안 지고 있던 (사실은 별로 쓸 데없는) 부담에서 벗어나길 바랐다. 자책을 일삼고 거절을 못하는 성격을 언니는 어쩌면 내가 남의 비난을 견딜 수 있을만큼 강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매일 아침을 차리고, 여행자를 맞이하거나 떠나보내고 청소를 했다. 남는 시간에는 스페인어 공부를 하고 태권도장에서 땀을 흘렸다. 7월 중순,우기가 오면 떠나기로 한 날이 올 때까지 난 여러가지를 비워냈고 어떤 열정을 다시 몸에 담을 날을 위하여 단단하게 단련했다. 별 일 없이 지내면서 설익은 내 안에 고갱이가 미지의 땅에서 잡히길 바랐다.
어느 날 새벽, 호스텔의 문을 두드린 남자는 갓 해병대를 제대한 동갑내기 한국인이었다. 부산사투리의 거센 억양으로 매일 밤 맥주를 벌컥거리던 쿨하고 직설적인 성격의 그는 이름도 ‘진솔’이었다. 술은 한 잔이면 눈알까지 발게지고 속마음을 답답할 정도로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나와 내내 불화했다. 그러나 신기하게 동시에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며칠 뒤엔 한식을 전공한 또래의 요리사가 호스텔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주민처럼 지내던 일상에서 벗어나 옅게나마 화장을 하고 과달라하라의 맛집과 박물관, 놀이동산에 놀러가는 등 그들과 함께 관광객이 되어 일주일을 보냈다.
몸이 피곤하고 상황이 악화되었을 때 짜증스러운 내 모습을 누가 보는 게 수치스럽고 싫다. 여럿이 함께 여행하는 게 즐거우면서도 피하게 되는 이유다. 멕시코 남쪽으로 향하는 그들의 일행이 되기로 결심했다. 생산의 중심 도시로 멕시코에서 가장 부유한 곳이었으나 지금은 교육도시로 유명한, 남미 여행자들이 휴양 도시 칸쿤보다 더 좋았다고 꼽는 과나후아또가 첫 번째 목적지가 되었다.
예상보다 2주나 일찍 일을 그만두고서, 우연히 몬테레이에서 살고 있다는 대학교 선배와 연락이 닿았다. 한때 직속 선배로 꽤나 가까웠던 사이였으나, 제대 후 어느 날 자취를 감추듯 사라졌었던 그는 몬테레이에 직업을 구해 멕시칸 여자친구와 살고 있다고 했다. 몬테레이로 향하는 버스에 급하게 짐과 몸을 구겨넣었다. 날짜를 잘못 예약해서 티켓을 교환해야되는데 과달라하라의 자주 가던 카페, 헬스장, 태권도장, 그리고 선생님들께 인사하느라 시간을 너무 많이 보내버린 것이다.
정작 호스텔 식구들과 제대로 작별을 하지 못했다. 친구는 내가 좋아하던 음식을 만들어 주었고, 시간에 쫓기던 나는 우악스럽게 겨우 한 입 떠 넣고 떠나야 했다. 여전히 냉장고처럼 차가운 버스에 앉아 덜컹덜컹 이동하는 내내 매운 칠리 소스와 고수향이 입에 맴돌아 눈물이 핑 돌았다.
‘지금처럼 열심히 일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잃지 않는다면, 서형은 최고의 인생을 사는거야’
라고 쓰여진 짧은 언니의 엽서를 꼭 쥔 채, 억지로 잠을 청했다.
토요일 이른 아침, 몬테레이의 버스 터미널에서 선배는 “연락 안 되는 버릇 아직도 못고쳤냐, 이년아.” 라며 날 맞이했다. 나의 옛 버릇을 알고 있는 사람을 지구 반대편, 과달라하라에서 버스로 10시간이나 북쪽으로 떨어진 몬테레이에서 만나고 있었다. 선배 커플과 함께 동물원, 공룡 박물관, 쇼핑몰, 영화관을 거쳐 매 끼 배 터지도록 맛있는 멕시코 음식을 먹었다. 묵은 빨래를 해결하고 시원하고 포근한 침대에서 늦잠도 즐겼다. 돈도 벌고 차도 사고 예쁜 여자친구까지 있지만 선배는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밝으면서도 속이 깊던 선배의 스무살 때 모습이 떠올랐다. 자세한 상황과 이야기들을 털어놓는 것은 계속 나답게 살아나갈 각자의 숙제로 미뤄두고 우린 말을 아꼈다. ‘터벅터벅, 꾸깃꾸깃’한 나를 응원한다며 터미널에서 다시 배웅해줬다.
몬테레이에서 주말을 보내고 일행이 먼저 도착한 과나후아또의 호스텔에 내린 건 월요일 아침. 두 시간쯤 손등이 까지도록 문을 두드린 끝에 열어준 사람은 단잠에서 깨 짜증이 가득한 진솔이었다. 인터넷 사이트와는 달리 아침 식사도 주지 않고 휴지도 없는 화장실을 자랑하는 이상한 호스텔엔 관리자도 잘 드나들지 않아 우리 셋 뿐이었다. 다만이 곳의 옥상 뷰는 루프트 바가 부럽지 않다.
알록달록하고 아기자기한 집이 산등성이를 따라 촘촘하게 자리하고 있다. 골목마다 남미와 유럽쯤의 감성이 그럴듯하게 짬뽕되어 있어서작은 도시지만 구경하기에 사나흘도 부족하다. 숟가락만 들면 말이 많아지는 식도락가들과 함께 다니니 매끼니가 풍요로웠다. 유식해보이는 낯선 음식 용어들을 주섬주섬 귓동냥으로 주어담았다. 우울해질 때면 굳이 꺼내어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던 내 비밀스런 상처들이 사실 내 또래들이라면 대부분 가지고있는 사소한 이야기었다는 것도 알았다. 특별할 것 없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햇볕을 쬐고 기념품 가게를 들락거리다 삼일이 지나자 우린 또 자연스럽게 각자가 향해야 할 다음 도시로 이동했다.
나는 다시 와하까로 돌아왔다. 멕시코 시티에서 일하던 친구가 직장을 그만두고 놀러오기로 했다. 딱 하루 지냈던 당시의 따뜻한 와하까가 그리웠기도 했다. 어느덧 와하까는 춥다고 느껴질 정도의 쌀랑한 날씨가 되어있었다. 특히 하루 중 아무때나 쏟아지는 소나기가 더 그렇게 느껴지게 했다. 마음에 쏙 드는 작은 카페에 앉아 연속으로 커피와 코코아를 주문해 홀짝 대고있었다. 어깨선이 한참 내려간, 몸에 비해 큰 살구색 니트를입은 할머님이 내 앞 테이블에 앉았다. 넉넉한 소매는 두 번 도톰하게 접혔고 분홍색 우산을 손에 쥔채 비를 피해 카페에 들어오신 듯 했다. 달각 소리를 내며 Azucar Refinada라 적힌 흰 설탕봉지를 북 찢어 뜨거운 커피가 담긴 잔을 휘젓는다. 왠지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노인이 되는 것이 무섭지 않았다.
변했다는 건 끊임없이 시도했다는 얘기일거다. 혀를 잔뜩 굴리며 괴상한 외국어를 배워보고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음식을 먹어보고 해보지 않은 일을 시도하면서 낯선 사람들과 불편한 첫 인사를 나누기 위해 용기를 내보는 것.
‘자유 의지를 버리면 삶의 존엄성을 잃게 된다.’고 한다.
스스로 설계한 삶이 아니면 행복할 수 없다. 93년 생의 어린 랩퍼 Cjamm은말한다. “내가 되고 싶은 사람, 살고 싶은 대로 사는 사람. 난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면서 될 거야, 내가 되고 싶은 사람.” 와하까의 인기 여행지들과 잘 치장된 와인바들을 가는 것 보다 더 많은 걸 얻었던 찰나의 순간이었다. 눈에 띌랑말랑 은은한 색이든, 멀리서도 알아볼 만큼 강렬한 색이든 내가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들에 귀를 기울이며 변해나간다면 앞으로도 다 괜찮을 것만 같았다.
언젠가 내가 버스타는 걸 좋아한다고 말했던 것 때문에 그랬을까. 멕시코에서 다시 과테말라로 돌아가는 길은 생각보다도 더 험난했다. 마지막 페소까지 탈탈 털어 썼는데 국경에서 폭탄 세금이 부과되었다. 짐을 짊어진 채, 몬테레이의 선배가 맡긴 소포까지 끙끙대며 들고서는내 카드를 읽어주는 ATM기를 찾아 울먹였다. 몇 푼 저렴하게 이동하려고 교통수단을 번갈아가며 이용했는데 그 과정에서 정말 매번 헤매어야했다.
국경을 넘자 딱히 목적지가 없었다. 출국일까지는 5일이 남았다. 대충 눈 앞의 ‘과테말라 시티’로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어쩐지 생각했던 것 보다 싸게 부른다 했더니 대신에 버스는 백 번쯤 정차했다. 버스가 멈추어 설 때마다 앞자리에 타고 있던 두 세명의 청년은 내려 호객행위를 하고 머리에 음식이나 휴지 따위를인 상인들이 우르르 올라탄다. 막무가내로 탄산음료나 말라버린 핫도그 등을 쥐어주며 급하게 장사를 한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창문을 통해 물이 줄줄 새기 시작했고, 며칠간 못 씻고 고생하느라 흘린 땀 냄새가 뭉근하게 풍겨 올라왔다. 덥고 축축해서 창문을 닫을 수도, 열을 수도 없는 채로 꼬박 하루가 걸려 과테말라의 수도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입국 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긴장해서 움츠러든 채 길고 긴 귀국길을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주변에서 말하던 ‘몇 년 후 인생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때’에 난 가장 뜬금없는 곳에서 6개월이란 시간을 특별하지 않게 보냈다.
지금 행복하지 않다면 곰곰히 생각해보자. 그 어떤 삶도 정답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동안 나는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면 나중에 후회한다고 배워왔다. 그러나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아도 모자르다. 이렇게 된 거, 다음 행선지를 일본의 수도 도쿄로 정했다. ‘이렇게 살자, 앞으로도’ 스스로 되새기며 여권에 새겨진 일본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