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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빠가 아들에게 들려주는 달리기 이야기

9번째 편지, 생각없이 달리기는 참 어렵다!

by sposumer

10km 달리기를 마치고…오른쪽에 보이는 오렌지색 한강다리는 ‘동호대교’

언제나 달리기도, 글쓰기도 미루기는 참 쉽다. 이 게으름을 위한 핑계는 너무나 많다. 어제는 흐리고 비가 조금씩 내리는 날씨였는데 꼭 달리기가 하고 싶었다. 정확히는 10km 달리기를 하고 싶었다. 왜 10km냐고? 10km라는 거리는 한 자리가 아니고 두 자리수 거리이니까. 9km와 1km 밖에 차이가 안나지만, 이상하게도 10km를 달리고 나서는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빠는 열심히 달려서 꼭 해보고 싶은 것 중에 하나가 시각장애인 분들의 페이서(pacer)가 되는 거다. (우리나라에서는 '페이서'보다는 '페이스메이커(pace maker)'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하는데, '페이스메이커'라는 단어는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들에서 사용하지 않아) 페이서는 일정한 거리를 일정한 속도로 달릴 수가 있어야만 해. 10년도 넘었는데, 아빠는 마라톤 대회를 나갔다가 페이서를 처음봤다. 대회에 출전한 아저씨들이 '페메'라고 부르더라. 42.195km 거리를 달리는 풀코스 마라톤의 경우에는 15분 간격으로 페메들이 있었던 것 같다. 3시간 페메를 따라서 달리면 42.195km를 3시간에 완주하는 거야. 페메는 목표시간이 적힌 풍선을 허리에 매고 달린다. 페메들은 엘리트 선수가 아니고 아빠같은 동호인이라서, 가끔은 페이스를 지키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 이럴 경우에는 페메가 '정말, 죄송합니다. 다른 페메를 따라가세요'라고 하더라.

서울에서 달리기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대표적인 장소는 남산공원 북측순환로야. 왕복으로 달려도 7km 정도 밖에 안되는 거리지만, 코스의 굴곡이 심해서 쉽지가 않아. 코너가 많은 건 기본이고, 내리막과 오르막이 반복되어서 고저도 차이도 크지. 그래서 달리기 매우 힘들다. 아빠도 달리기를 열심히 할 때는 이 북측순환로를 자주 달렸어. 그리고 여기서 시각장애인 분들과 함께 달리는 페이서들을 만나게 되었지. 뒤따라 달리면서 봤는데, 정말 대단하시더라.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을 손목에 띠를 매어 연결해서 달리는데, 발소리 외에는 길잡이가 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지. 정확한 보폭으로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달리기를 이끌어주는 모습이 멋지기도 했지만, 페이서랑 함께 달리는 시각장애인의 얼굴 표정이 너무 행복해서 아빠까지 잠깐 행복했다.


불쑥 페이서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아빠가 페이스 조절을 잘 못하기 때문이다. 균일한 페이스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달리는 내 몸 외에는 딴 생각을 하면 안되. 내 몸에만 집중을 해도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아빠는 달리기를 하다보면 골똘히 생각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면 페이스가 들쑥날쑥해지고 말아. 어제는 생각없이 달려보자라고 다징을 하고 달리기를 시작했어. 하지만 역시 잘 안되더라. 어제 달리기를 할 때, 무선 이어폰으로 리처드 막스(Richard Marx) 노래를 들었지. 오랫 만에 들으니까 목소리는 참 좋은데, 내가 아는 리처드 막스의 히트곡이 2곡 밖에 없어서 다른 노래가 나올 때 딴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수가 인생에서 히트곡 하나 내기가 쉽지 않지만, 이 히트곡이 몇 개 안되면, 말년에 좀 씁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누구나 그 히트곡만을 불러달라고 요청을 한다면, 그 히트곡을 부르는 가수 입장에서는 참 지겹겠지? 물론 밥벌이로 그 히트곡을 부를 수 밖에 없겠지만...


이상하게 리처드 막스의 히트곡은 아빠의 이직과 연결이 되더라. 아빠는 17년 동안 일을 했는데, 처음 일을한 홍보대행사를 제외하고는 5년 이상 다닌 곳이 없다. 지금 일하고 있는 비영리단체에서도 계약직으로 5개월, 정규직으로 2개월 이렇게 7개월을 일하고 이직을 한다. 이직을 할 때마다 아빠는 고민을 많이 한다. 내가 태어나고 나서는 더 고민이 많다. 내가 요즘 제일 좋아하는 만화 '옥토넛'의 대장이 대원들을 이끌어야 하는 것처럼 니가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는 아빠가 대장이 되어야 하니까 말이야.


이번 이직도 잘한 결정인지는 아빠가 새 회사에 가보아야지 알 수가 있어. 그것도 몇 개월이 지나야겠지. 생각없이 달리기는 쉽지 않은 것처럼, 생각없이 무작정 열심히 일하는 것도 쉽지 않단다. 하지만, 아빠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달리기와 관련된 일이니까, 한 번 열심히 해볼께. 우리 원이는 밥 잘먹고, 친구들이랑 사이좋게 놀면서 지켜봐줘! Now and forever, I will be your father!


PS 딴 생각을 하면서 달렸지만, 10km를 50분 안에 달렸어. 빠른 기록은 아니지만 생각보다 페이스가 뒤죽박죽은 아니라서 기분 좋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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