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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빠가 아들에게 들려주는 달리기 이야기

11번째, 절박해야 완주할 수 있다(2021 년 서울100K 완주기)

by sposumer


기록은 아무래도 좋아. 이번에는 완주가 더 중요했다.


사랑하는 원이야,

한 주전 일요일에 아빠가 오후가 되서야 집에 왔지? 니가 아빠한테 ‘아빠, 다다다다 하고 왔어?’라고 물어봤던 것이 기억나네. 더 늦기 전에 2021년 서울100K 완주기를 적어본다.


이상하게 꼭 완주하고 싶었던 대회

이 대회를 처음 신청할 때는 회사일과 관련해서 참고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빠는 회사의 권고사직에 응했고, 그 이후에 이상하게 꼭 완주하고 싶었던 대회가 되어버렸다. 사람은 가끔 주변 사람들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 일에 자신이 신경을 쓰다 보면 괜한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다. 이번에는 아빠가 그런 경우라고 생각해. 다른 사람들은 아빠가 이 대회에 출전하던 완주하던 우승을 하던 별 관심이 없을텐데, 아빠는 괜히 이 대회를 완주해서 아빠가 쓸모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이런 쓸데없는 생각과 관련없이 완주를 하고 싶은 다른 이유는 아빠가 아웃도어 브랜드인 노스페이스에 근무할 때, 일본 군마현에서 열린 트레일 러닝 대회에 출전했다가 완주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어. 벌써 10년도 더 전에 일이니까 이때까지만 해도 30대인 아빠는 체력만큼은 자신이 있었지. 당연히 완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군마현 트레일 러닝 대회 코스가 산 정상에서 나선형으로 뱅글뱅글 돌면서 내려오는 구간이 있었고, 힘이 드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다리가 움직이지를 않아서 포기하고 말았지. 지금 생각해보면 출장으로 간 대회였기 때문에 더 쉽게 포기한 것 같기도 해. 이때는 해외 출장도 자주 다니던 때라서 출장을 별로 일처럼 생각하지 않고, 즐거운 일로 생각했었고 항공편이나 숙박비 등이 출장비로 해결이 되는 행복한 시절이었다. 만약 아빠가 사비로 항공편을 마련해서 출전했다고 하면 더 악착같이 포기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 같네.


길치는 언제나 힘들어

아빠는 100km 부문을 신청하지는 않았어.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 연속으로 50km씩을 달리는 것은 자신이 없었다. 55km 거리에 난이도가 가장 낮은 SKY B 코스를 신청했고, 대회를 위해서 따로 연습을 하지는 못했어. 다행이 트레일 러닝용 장비들은 하나씩 사서 모아둔 것이 있어서 이것들만 잘 챙겼지. 일요일 오전 4시에 일어나서 떡을 대충 먹고 지하철을 타고 출발지인 도봉산으로 갔다. 엄마가 새벽에 추울테니 긴 팔과 긴 바지를 입으라고 해서 말을 잘 들었어. 오전 6시가 조금 넘어서 도봉산역에 도착했는데 꽤 추웠다. 엄마말을 듣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오전 6시 30분쯤 출발지에서 선수 등록을 하고 출발했어. 아빠는 길치라서 가민 945에 대회 코스 GPX 파일을 입력해두었어. 이러면 자동차 네비게이션처럼 안내를 받을 수 있거든. 오전 9시 정도까지는 컨디션도 좋고 아주 즐거웠다. 하지만 아빠가 GPX 파일을 믿지 않고 길을 잘못들어서 수락산 쪽 둘래길이 아니라 수락산 정상까지 올라갔다. 다시 급하게 코스대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급한 암벽 경사로를 올라서 정상에 올라가는 바람에 힘이 쭉 빠져버려서 이후에 고생을 했단다.


아빠를 살려준 것 스틱과 100k 참가자들

특히 하체에 힘이 쭉 빠진 상태였지만, 트레일 러닝 배낭에 넣어두었던 레키 스틱 덕분에 살았단다. 스틱이 있으면 상체의 힘까지 사용해서 전진할 수 있거든. 또 첫 번째 CP(Check Point)에서 음료도 충분히 마셨고, 토요일에 이어서 50km를 달리고 있는 100km 부문 참가자 분들 때문에 힘을 냈다. 아빠가 고생을 하기는 했지만 이틀 연속으로 50km를 달리는 참가자들의 고생과는 비교할 수는 없잖아? 4시간 정도를 달리니까 발이 붓기 시작해서 발목이 꺾기지 않도록 착용했던 CEP 발목 보호대를 벗었어. 트레일 러닝화 신발끈도 조금 헐렁하게 다시 고쳐 맸어. 그리고 코스도 아빠가 가본 적이 있는 아차산이 나와서 더 힘을 냈다. 아차산을 지나서 잘 아는 한강으로 들어오니 트레일 러닝이라기 보다는 로드 레이스에 가까워졌다. 이후에 코스는 어려운 것이 없었단다. 다만 거리가 지나면 지날 수록 마음대로 몸이 잘 움직이지 않는게 문제였지. 점심이 지난 한강은 바람이 불어서 서있으면 추웠지만 가끔씩 멈춰서 몸을 달래가면서 한 걸음씩 전진했어(달리다가 걷다가, 서기를 반복했기 때문에 전진했다는 표현이 가장 적당할 것 같다). 로드 레이스에서 스틱을 사용하기는 애매해서 스틱은 트레일 러닝 배낭에 집어넣었어. 끝까지 아빠를 멈추지 않게 해준 것은 아빠를 추월해가는 100km 참가자들이었어. 청계천에 진입했을 때, 엄마가 아빠를 걱정하는 문자를 보냈다. 하지만 아빠는 ‘완주할 거야’라는 답장을 보내고 계속 결승점을 향해 갔다.


내가 모르는 누군가를 응원한다는 것

정말 마지막 3km가 제일 힘들었지만 아빠는 골인을 했다. 골인을 하고 나서 출발점에서 기록 측정이 안되었다는 운영요원의 말 때문에 잠깐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곧 아빠는 아빠의 완주 기록을 찾을 수가 있었어. 그리고 나서 생각을 해보니까, 정말 달리기를 하면서 누군가의 응원을 받아본 것이 정말 오래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른 새벽부터 참가자들의 길을 안내해주던 운영요원들과 산길에서 길을 양보해주면서 응원을 해준 모든 사람들이 고마웠다. 아빠는 이렇게 달리는 사람들을 많이 응원해준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좀 부끄럽다. 우리나라 달리기 대회에서 자원봉사자들은 대부분 자원봉사 점수가 필요한 중고등학생들이었단다. 아빠도 더 늦기 전에 달리기 대회에서 정성을 다하는 자원봉사자가 되어보고 싶다고 생각을 했다. 내가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을 응원해주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우리 원이도 목소리가 크니까 앞으로 모르는 누군가라도 꼭 큰 소리로 응원을 해주면 좋겠다.

한강에서 만난 눈이 달린 귀여운 풀.

아빠가 이번 대회를 완주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앞에도 설명을 했지만, 완주가 절박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쓸데없는 일이라고 해도 아빠는 이번 대회 완주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자신감을 얻을 수가 있었다. 대회에서 기록과 별개로 완주는 언제나 큰 의미가 있다. 원이도 더 자라서 절박하게 달성하고 싶은 목표가 생기고 이 목표를 꼭 달성할 수 있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아빠가


P.S. 참, 코스를 지나다가 화가 이중섭 묘소 표지판이 있는 것을 보았다. 아빠는 우라나라 화가 중에서 이중섭을 제일 좋아한다. 나중에 원이에게 그 이유도 설명을 해줄께. 그림을 그리면서 가족과 함께 살기를 열망하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중섭. 꼭 묘소도 한 번 찾아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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