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과 나무를 보면서

그의 먼 인상은 짙고 투박한 회색 같았다. 그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니 더욱 그러했겠지만 차분한 무표정에 무표현이 더하여 그림의 밑그림 색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서 조금이나마 가까이서 말을 주고받는 기회가 생겼을 때에서야 비로소 첫인상이라고 할 만한 이미지가 생겼다. 그를 여전히 모르지만, 첫인상에 기대어 말하자면 흙 같은 사람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주변 사람들에게 무관심해 보인 회색 느낌은 실상 웬만한 사람이며 다 품을 수 있는 넉넉함이라는 품성으로 느껴졌다. 마치 조용히 거기에 있지만 버려지는 것들을 받아들여 원래의 것들로 되돌려 받아주고, 심겨진 것들을 지탱하고 지지해주어 자라게 하는 그런 땅 말이다.


그녀의 먼 기억은 시골 마을에 방학을 맞아 놀러온 서울 소녀 아이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활발하고 용기있어 보인 그녀는 그림의 밑그림과는 전혀 다른 유성물감으로 그린 풍경화 같다고 해야할 것이다. 우연히 다시 인연이 되어 말을 주고받는 기회가 생겨서 다시 기억이 소환되고 살아있는 인물이 되어 실제의 모습을 조금 더 알게 되니, 그녀는 그림은 아니고 나무에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꽃이어도 좋지만 꽃은 금방 시드니 철에 맞추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나무라고 하는 것이 더 좋겠다. 나무는 숨겨질 수 없고 대지와 하늘을 향하여 두 팔을 힘차게 펼친다. 조잘거리는 새들은 즐겁게 가지 위에 머물러 쉼을 얻는다. 나무는 심심하지 않다.


나무는 땅이 영 못 마땅했다. 도무지 말이 없고, 반응도 없고 무엇이라 해도 가만히 있기 때문이다.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보여주질 않는다. 답답하다. 땅은 나무가 점점 부담스러워졌다. 매일 무슨 말을 많이 하고, 많이 하는 것은 좋은데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기 때문에 조금은 당황스럽고 눌리는 답답한 느낌을 받았다. 그저 헤어질 수 없어서 그 자리에 있을 뿐인 모양새다.


인생은 아름답고 놀랍다. 기적이 벌어진 거다. 어떤 일이 작용했는지는 모르지만 나무는 땅이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땅도 마찬가지로 나무가 누구인지를 왜 그렇게 말하는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땅은 나무를 자라게 하고, 나무는 땅을 기름지게 하는 서로 깊이 연결된 존재임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리고 땅과 나무는 더없이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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