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잘 지내지 않아도, 화해할 수 있더라.

가족만으로, 충만해진 남자

by 봄아범


사람은 누구나 불편하다. 아기일 때는 직접 먹을 수 없어서 불편하고, 학생일 때는 친구와 싸워서 불편하다. 통장에 찍히는 월급이 부족해서 불편하고, 정밀검사가 필요한 몸의 곳곳이 불편하다. 봄에는 꽃과 송진 가루가, 여름에는 물웅덩이를 밟은 운동화가 불편하다. 가을에는 유난히 따가운 햇볕이, 겨울에는 빙판길이 불편하다. 사랑하는 아이와도 그렇다. 40분 이상 이어지는 아이의 울음이 괴롭다. 넘어질 것 같은 달리기가 조마조마하다. 자신이 호랑이와 사자라면서 지르는 포효에 귀가 아프다. 내가 그렇다.




그때의 나는 모든 것이 불편했다. 퇴근 시간을 넘겨서까지 참여해야 하는 워크숍에 가기 싫었다. 계엄 이후의 한남동을 가는 것이 어지러웠다. 10년 이상을 다닌 직장이 권태로웠다. 출근하며 퇴근을 바라는 나에게 회사의 워크숍은 피하고 싶은 시간이었다. 강의를 들으며 자연스레 딴짓을 했다. 시 구절의 필사. 주말에 저녁 모임에서 시 낭송을 하기로 했다. 몇 번을 반복해서 쓰다 보니까 강의는 중반 이후로 흘렀다. 강연자가 호흡을 유도했다. 들숨에는 공기를 넣고, 날숨에는 불편한 것들을 내뱉게 했다. 두 번, 다섯 번, 열 번. 숨을 쉬고 나니까 남는 것은 사랑뿐이었다. 끄적이던 시구절이 새롭게 다가왔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정호승


사람들은 사랑을 모른다.

자기 마음대로 사랑하고 사랑한다고 말을 한다.

너는 어찌 되든지 나만 사랑하고 사랑한다고 말을 한다.

(중략)

나를 살리는 것은 사랑이 아닌 것을 알지 못한다.

너를 살리는 것이 사랑인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새벽 출근을 하는 아들보다 더 일찍 일어나는 어머니가 사랑이었다. 자식이 끼니를 거를까 봐, 반지하방에서 된장찌개를 앉히고 찬 부엌 바닥에 몸을 눕히는 어머니가 사랑이었다. 육아와 직장으로 다크서클이 짙어가면서도, 남편을 위해 주먹밥을 싸는 아내가 사랑이었다. 조금만 힘이 들라치면 “나 힘들어!”라고 화를 뿜어내는 내가 사랑이 아니었다. 폭풍 같은 감정이 지나가고 ‘사랑한다.’는 말로 만회하려는 내가 사랑이 아니었다. 그제야, 회사의 워크숍이 진행되는 장소가 다시 보였다. 아내를 처음 만난 곳. 아내는 봉사자로, 나는 참가자로 참여했던 프로그램이 진행된 수도원이었다. 그제야, 내 삶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가족과의 사랑임을 가슴 깊이 느꼈다. 그러니까, 그 밖의 불편한 것에서 자유로워졌다.


아내를 처음 만났던 천주교의 프로그램. 사진 맨 앞의 단발머리 여성과 가운데의 꽃을 든 남자가 결혼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불편한 존재와 화해해야 한다.” 진행자로, 작가로의 새로운 삶을 지향으로 기도했다. 신이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화해해야 다음 문을 열 수 있다고. 그럴 수 없다고 단언했다. 불편한 사람, 직장에서 잘 지낼 수 없다고. 온전히 나만의 생각이었다. 잘 지내지 않아도 화해할 수 있었다. 내 마음이 편하면 그만이었다. 그제야, 사무실에서 굳어있던 표정이 한결 풀어졌다. 불편한 사람과 눈을 마주하고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신의 아들이어서 행복해요." 워크숍 때 느낀 바를 부모님에게 털어놓으며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아들의 고백 덕분에 어머니도 자유로워졌다. 부족한 가운데 키워서, 아들이 불행하다고 여길까 봐 마음 졸인 20년 남짓한 시간이었다.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며 눈물을 보이시는 어머니의 얼굴. 편안한 당신의 표정이 아이를 대하는 나의 모습이길 바란다. 뛰면 다친다는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아이와 함께 달리는 놀이터. 나중에 치울 것에 한숨짓기보다 마음껏 펼치는 찰흙과 오일 파스텔. 아빠 사자가 되어 아기 사자인 아이와 함께 외치는 으르렁. 얼굴에 주름이 패일 정도로 웃는다. 아이와의 시간이 즐거워진다. 지금의 순간이 나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을 행복임을 잊지 않는다. 나를 살리는 가족의 사랑만큼, 너를 살리는 사랑을 하겠다고 다짐하면서.


화해하는 법을 몰랐던 나와 여동생. 지금은 각자 아이를 살리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었다.


keyword
이전 04화다시, 태어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