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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것 같아요

가족을, 새로이 만나는 청년

by 봄아범


시간 약속에 민감한 편이다. 아침 출근길 생방송 라디오의 DJ로 살아가면서 민감함은 강박으로 자랐다. 지각을 하는 악몽. 5분 더 잘까 봐 스프링처럼 튀어 나가듯이 일어나는 버릇. 눈앞에서 열차를 놓쳐 택시를 잡던 숱한 아침. 타고 있던 택시를 내려서 달렸던 을지로의 거리. 단 1초라도 늦으면 방송사고로 이어지는 생활을 10년 동안 버텨왔다. 육아도 예외는 없었다. 아이의 신체 시계를 파악한 뒤, 먹고 놀고 자고를 칼같이 맞추며 건강히 키운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육아가 그렇듯이 늘어나는 변수 속에 혼돈의 카오스로 상황은 급변했다. 주말 오전. 외출 준비가 늦어지면 조바심이 났다. 평소라면 아기가 직접 입게 할 옷을 억지로 입히는 손길이 거칠어졌다. 결국 눈물을 터트리는 아이와 암담한 표정의 아내를 마주한다. 그럼에도 내 머릿속은 하나의 질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각해도 괜찮을까?




아니. 이건 분명 괜찮지 않았다. 약속 시간은 12시 50분.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도착 시간은 12시 55분. 약속은 안산 웨딩 센터의 결혼식. 나는 하객이 아니다. 사회자다! 새로운 부부의 시작에 걸림돌이 될 수 있었다. 서늘해지는 등골. 등 위에 한 줄기 땀이 흘렀다. 서늘함과 땀이 교차하는 등판처럼, 외출 전 오전은 일과 육아가 혼재되어 있었다. 결혼식 사회 준비와 아이와 놀아주며 시간을 꽉 채우고 정신없이 출발했다. 도착지의 방향은 남쪽이었다. 자동차는 군자교를 넘어 장한평으로, 답십리로. 자신을 북으로 보내달라며 외쳤다.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하고 도착지를 확인하니까 서울시청의 웨딩 센터였다! 5월의 토요일. 정오의 도로. 나들이를 가는 수많은 가족을 헤치고 한남동과 사당을 뚫어야 했다.




아이가 많이 아프거나, 급똥이거나. 나를 바라보는 다른 차량의 시선이 이렇지 않았을까. 도착까지 비상등을 끈 적이 없었다. 좌회전 방향인 1차선을 타다가 맨 앞에서 직진 차선으로 급하게 바꿨다. 모두를 속이며, 모두에게 사과하며 달렸다. 규정속도가 70km인 도로에서는 시속 110km. 110km인 도로에서는 시속 164km. 딱지를 끊는 것보다 이 질주의 결승 테이프를 시간 안에 끊는 게 더 중요하다고 느낄 때쯤, 도착 예상 시간은 12시 30분으로 줄었다.

한숨 고를 법도 한데, 여유가 주어지진 않았다. 들숨과 날숨으로 하객을 머금고 뱉는 웨딩 센터에 미등록 차량은 자리할 곳이 없었다. 신부 아버지에게 부탁받은 결혼식 사회이기에 예비부부를 본 적이 없었다. 결국, 본식 전 웨딩 촬영을 하는 신랑에게 무례를 범했다. 신랑 대신 식장 밖까지 나온 남동생에게 외쳤다. “혼주 차량이요!” 25분을 줄인 것도 기적. 사회자를 혼주로 만드는 것도 기적. 본 건물 주차장에 시간 안에 들어온 것도 기적이었다. 그제야, 신에게 고백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언뜻 보기엔 편안하지만, 바짝 마른 입술과 고꾸라진 코르사주.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도착한 사회자의 모습이다.


저는 죽었나요? 잠들기 전에 신에게 물었다. 사회자가 결혼식에 늦을 수 없다며 눈이 돌아가 핸들을 잡았던 순간을 떠올렸다. 핸들을 조금만 더 꺾었더라면. 아니, 핸들을 꺾었고 지금의 나는 영혼만 가족과 함께하는 거라면. 그럼에도, 지금의 내가 살아있다면. 나의 지금은 두 번째 삶이 되었다. 소스라치게 놀랐던 일은 나를 죽음으로 몰았고, 다시 태어나게 했다. 그러니까 모든 순간이 감사해졌다. 부스스한 모습으로 좋은 아침을 인사하는 아내. 건강하게 자라길 바라며 아이의 이마에 대고 신에게 비는 기도. 하원 때 달려와 품에 안기는 아기. 보고 싶은 손주와 사랑한다고 말하는 부모님들과의 영상 통화. 습관적으로 보냈던 모든 일상의 찰나가 빛나기 시작했다. 빛이 뻗어나가듯, 시간 약속의 강박에서 자유로워졌다. 일생에 한 번 있는 결혼식처럼, 아기와 함께하는 시간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했다. 혼인의 진행을 맡아야 하는 중차대한 일이 아니라면, 늦어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덕분에, 아이를 다루는 손길이 부드러워진다. 쫓기듯이 시계를 바라보는 시선을 거둔다. 바지를 입겠다며 한쪽에 두 다리를 모두 넣는 아이를 바라본다. 서로 깔깔 웃으며 말한다. 매일을 생일로 만들어주어서 진심으로 고맙다고.


2025년 아범의 생일. 자신의 생일보다 더 기뻐하고 초를 끄는 봄. 함께하는 일상이 소중하니 매일이 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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