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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가족으로, 만족 못했던 소년

by 봄아범

꿈을 이야기하는 것은 설레는 일이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 20년이 지난 지금도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들과 하고 싶은 일을 나눈 적이 있다. 음악을 하고 싶다는 J. 특별한 꿈은 없다던 H. 그때도 나의 꿈은 아나운서였다. 나보다 더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의 꿈을 말하던 친구가 있었다. 가톨릭 사제가 되고 싶다던 Y. 우리 모두 나중에 결혼식은 가톨릭 미사로 하자. 꼭 미사를 집전해달라. 농담 섞인 상상으로 웃으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실제로 그가 집전하는 미사로 결혼한 친구는 없었다. 신부가 되기 전에 친구들 모두 결혼을 했으니까. Y가 꿈을 이루는 데 걸린 시간은 19년이었다.




Y가 꿈을 이루는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그의 수능 점수로는 서울에 있는 신학대학에 입학하기 어려웠다. 전문대에 입학했다.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전문대를 졸업하고 다시 공부를 했다. 원하는 점수를 만들어냈다. 다음은 면접이었다. 불합격 통지를 받았다. 이유를 알기 어려웠다. 막막했다. 다시 마음을 잡았다. 마음이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수능 문제집이 눈에 안 들어왔다. 버티기가 어려웠다. 힘이 바닥나서 떨어지는 새처럼, 미끄러졌다. 기준 점수 부족으로 세 번째 도전도 실패했다. 마음이 아팠다. 고통이 몸에 드러났다. 대상포진에 걸렸다. 얼굴 한쪽이 움직이지 않았다. 신을 따르겠다는 꿈이 막히니까, 기도의 위로도 치유가 되기 어려웠다. 이런 그를 도대체 누가 위로해 줄 수 있을까.




다시, 고등학교 2학년 겨울. 그때의 Y도 무엇으로도 위로받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성당에서 열리는 중, 고등부 연극을 준비했다. 단원 구성은 고등학교 2학년부터 중학교 1학년 학생들. Y가 단장이었고, 내가 부단장이었다. 연습으로 모이는 횟수에 비해 간식 지원비는 턱없이 부족했다. Y가 집에 있는 쌀과 식재료를 가져와서 볶음밥을 만들었다. 그에게 새로운 별명이 생겼다. 엄마. 맛있게 먹는 단원들을 보며 그는 뿌듯했으리라. 하지만, 낳아준 엄마의 말을 잘 들어야 하는 학생 시절. 종교활동보다는 학원이 우선인 게 당연했다. 하나, 둘씩 연습에 나오지 않았다. 대사나 지문을 실수해도 웃음으로 무마하려 했다. 단장인 그가 답답해 보였다. 크게 한숨을 쉬더니 연습실에서 나가버렸다. Y의 뒤를 쫓았다. 신나게 요리를 하던 부엌 구석에서 울고 있었다. 해 줄 말이 없었다. 그저 그의 옆에 있었다. 그것뿐이었다. Y의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KakaoTalk_20250919_181550497.jpg 2003년의 우리들. 연극 후 인사를 하러 한 줄로 서 있다.


열아홉 해가 지나고, 다시 겨울. 그날의 나는 위로가 필요했다. 지원했던 회사에서 또 불합격 통지를 받았다. 쉰 번 이상 떨어졌으려나. 한숨이 나왔다. 낙담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친구가 꿈을 이룬 것을 축하하러 가는 길이었으니까. 가톨릭 사제 서품식. 상기되어 있을 거라 생각한 Y는 차분했다. 새로운 시작이라는 꽃말을 가진 프리지어 한 다발을 건넸다.


“신부 될 때까지 얼마나 걸렸더라?”

"글쎄……."

어느 순간부터는 햇수를 세지 않게 되더라.


꿈을 바라보며 우직하게 걸어간 그의 시간이 느껴졌다. Y를 향한 존경이, 탈락의 횟수를 세고 있는 나를 향한 부끄러움이 눈에서 흘렀다. 친구를 축하하러 온 자리인데, 친구에게 위로를 받았다. 눈물을 훔치는 나에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지, 고등학교 2학년 때 Y를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던 나처럼. 정말 힘든 때는 어떤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고등학생의 Y도. 도전자인 나도. 가족 같은 친구의 존재를 느끼면 충분했다. 걸어가야 하는 건 자신의 몫이니까. 사제 서품식이 시작되었다. Y를 부르는 호명에 그가 응답한다. 성전이 쩌렁쩌렁 울린다.


“예! 여기 있습니다!”


KakaoTalk_20250919_181301952.jpg Y와 나는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 졸업식의 우리. 정말. 참. 어렸다.


결혼식에 부부는 혼인서약을 한다. 부부생활을 해나가는 방향과 다짐을 담아 약속을 한다. 신을 따르겠다는 친구도 성경 속 구절을 정하고 그렇게 살겠다고 약속했다. 가톨릭 사제로 살아가는 데 기둥이 되는 말.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이미 그는 문장 그대로 살고 있다. 하나의 꿈을 이루기 위한 삶 자체가 말해준다. 신의 모상(模像)인 우리. 사람에게도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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