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비어있을 때

‘살면 살아진다’는 고도의 유연함에 대하여

by 행복한자유인

사람은 하루에 7,000에서 20,000 단어를 말한다고 한다. 친한 지인은 하루에 50,000 단어를 말해야 만족감을 느낀다. 외향적인 사람들은 사람들과 대화하며 에너지를 채운다. 자신이 말하고 사람들이 재밌어하면 힘이 솟는다. 그래서 듣는 것에 취약하고 빨리 하고 싶은 말이 생각나 상대방의 말을 끊기도 한다.


나는 외향적인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사람들과 대화를 통해서 아이디어를 얻기도 하고 풀리지 않는 문제의 실마리를 찾기도 한다. 고민을 해결한다. 에너지를 얻는다.


그랬던 나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대화하는 시간이 현저하게 줄었다. 아침에 출근하면 책상 앞에 앉아 내가 해야 할 일을 한다. 컴퓨터를 보며 혼자 일을 한다. 나에게는 낯선 경험이다. 하루 일과 중에 사람들과 만나 회의하는 일도 줄었다. 같은 목표를 위해 함께 고민하던 것이 없어졌다.


그래서 심심한 것 같기도 하고, 외로운 것 같기도 하고, 신이 나지 않는다. 차분해진 것 같다. 비전 상실의 고민 속에 나타난 현상 중에 하나이다. 직장에서의 관계에 대한 생각이 변화하는 과정이다.


일을 같이하는 것, 의견을 나누고 새로운 시각을 경험하는 것, 함께 성장하는 것, 협업을 통해 에너지를 얻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물론, 협업 때문에 피곤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때로는 혼자 일하는 것이 좋을 때도 있다. 협업과 개인적 집중의 적당함은 과업마다 차이가 있다. 말을 많이 하면 신나기도 하지만, 실수도 많아진다. 황금률은 찾을 수 있을까? 어쨌든 낯선 고요함과 만나고 있다.


최근 3개월 간 했던 일을 정리하며 회고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들로 가득했다. 경험치는 쌓였지만 전문성과는 상관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이 맞나 하는 압박감을 느꼈다.


직장에서 어떤 일을 할 때, ‘이 일은 정말 내가 원했던 일이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마도 나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으로 여기까지 왔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가 내가 바라고 원했던 곳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면 너무도 슬픈 일이다. 그런데 지금 내가 그러고 있다. 사실 내가 바라고 원했던 실체는 뚜렷하지 않다.


전문성이라는 이름의 압박이 있다. 전문성에 높은 가치를 두는 사회라서 그런 것일까? 사람들은 전문성과 성장에 높은 가치를 둔다. 이런 강박 때문인지 가끔 ‘꼭 전문가가 되어야 하는가?’, ‘왜 전문가가 되어야 하는가?’ 반문한다.


우리는 단순한 업무를 평가절하할 때가 많다. 하지만, 단순 반복적인 일이 복잡한 머릿속을 맑게 하고 나를 회복시켜 주기도 한다. 목적을 찾는 피곤함보다 ‘그냥’이라는 단순함이 더 좋은 결과를 내기도 한다. 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다양한 분야에서 놀랍게 성과를 내는 사람들을 찾을 수 있다. 단순 반복적인 일에서 놀라운 능력을 보인다.


텍스트로 가득 찬 발표보다 핵심과 여백으로 전달되는 발표가 더 좋다. 복잡한 설계보다 단순한 설계가 더 좋다. 복잡한 머릿속 보다 하나에 집중하는 머릿속이 더 좋다.


내가 좋아하는 선배가 회사에서 가장 힘든 시기가 있었다. 그분은 그 힘든 시기를 평온하게 극복했다. 어떻게 극복하셨냐고 물었다. 그분의 답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저 눈앞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라는. 걸을 수 있을 땐 걷고, 일이 주어지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


‘살면 살아진다.’


NETFLIX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에 나왔던 대사였다. 제주 방언으로 나온다. ‘살암시민 살아진다.’


사실 우리의 인생이 내가 설계한 대로, 바라던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살면 살아진다’는 무기력이 아니다. 높은 수준의 ‘유연함’이다. 거창한 비전과 목적이 사라진 상태에서도 ‘그저 오늘 하루를 살아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긍정이다.


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했고, 거기엔 전문성이 하나도 없었다’고 불평하고 말았다. 그 불평은 거만했다. 내 해석이 잘못되었다. 나는 ‘여러 변화’에도 불구하고 묵묵하게 아무 문제 없이 그 일을 해냈다. 새롭게 시도해서 얻은 결과도 있다. 다른 사람이 경험할 수 없었던 내 경험과 역량이 밑거름이 되었다. 그런데 나는 낡은 생각으로 나를 채찍질하고 말았다.


나는 발전과 성장이 없었다는 ‘불안’을 경험했다. 비전 상실이라는 ‘공허함’을 느꼈다. 그런데, 억지로 채우려 했고 고치려 했기에 보지 못한 것들이 있다. ‘억지로’가 아니라 일단 수용(Acceptance)하는 것이 먼저였다. 진공(‘없었다’) 상태는 무(無)가 아니다. 역설적으로 강력한 압력이 작용하는 상태이다. 그 압력은 ‘새로운 의미로 채워지려고 하는 힘’이다.


그래서 우리는 ‘비움’, ‘비우기’가 필요하다. 낯설고 불편하고 이상하다. 심지어 ‘멍 때리기 대회’도 있다. 새로운 술을 맛보려면 잔을 비우거나, 새로운 잔을 가져와야 한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건 논리적이고 오래된 진리다.


그런데 우리는 ‘비우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뭔가를 계속 배우고 채우며 치열하게 살았는데, 덜어내는 기술은 배우지 못했다. 비움의 기술, 내려놓음의 기술, 여유의 기술, 침묵의 기술, 유예의 기술이 필요하다.


관계 중심적이고 외향적인 사람에게 혼자 책상 앞에서만 일하는 것은 낯설고 어렵고 고독하다. 하지만, 집중의 상태이고, 뭔가를 비워내고 있는 중이다. 그런 나 자신을 응시해 보자.


우리가 흔히 ‘여백의 미’라는 표현을 쓴다. 그런데 여백 자체가 아름다운 것일까? 여백 때문에 더 돋보이게 되는 무엇인가가 아름답게 보이는 걸까? 디자인이나 타이포그래피에서 여백은 큰 힘을 발휘한다. 내가 해왔던 일을 가득 채우기보다 의도적인 여백을 넣어보는 건 어떨까?


지금 내가 느끼는 외로움, 소외감, 고립, 조용함, 불안, 공허감. ‘공백’이 아닌 ‘여백’이라는 관점은 어떨까? 나는 재미없는 것, 지루한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신나지 않는 지금의 상태가 ‘지루하게’ 느껴져 재미가 없다. 그런데, 오히려 지금이 중요한 순간이 아닐까?


박물관에 그림을 보러 간 기억이 있다. 나는 그림을 잘 모른다. 그래서 그림을 고상하게 해석하려고 하거나 뭔가 공부하려 했다. 그런데 기억조차 나지 않는 누군가가 나에게 했던 말이 기억난다. 그림을 보고 무엇이 느껴지는지 감각에 충실하는 게 먼저라고 했다. 그림의 역사, 뒷 이야기는 나중에 알면 또 다른 즐거움이라고. 그래서 그 이후, 그림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드는지 생각하곤 한다. ‘선이 이쁘네. 슬프네. 무겁네. 복잡하네. 아프네…’


내 삶의 감각에 충실해 보는 것, 빈 공간을 편안하게 느끼는 것, 외로움을 고독으로 즐겨보는 것, 소음 속에서 고요함을 경험해 보는 것. 이것들이 다 기술이다.


소프트웨어 개발에서 메모리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연결이 끊어진 것들이 메모리를 점유하지 못하도록 비우는 작업을 한다. 가비지 컬렉션(Garbage Collection, GC)이라고 한다. 삶에 남아서 복잡하게 만드는 것들을 때로는 비워야 할 것 같다. 그래서 그 비우는 작업을 미워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불안하다. 사람을 만나지 않고 혼자만 있으면 외롭다. 무엇인가 산출물을 끊임없이 만들어야 뭔가 한 것 같다. '존재(Being)'보다 '행위(Doing)'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왔기 때문에, 행위가 멈추면 존재 자체가 위태롭다고 느낀다.


나는 뭐를 할 수 있어라는 스킬이 아니라 나는 이게 재밌어라는 ‘취향’이 더 필요할 때가 있다. 물론 재밌고 좋아하는 일을 찾기보다 잘하는 일을 꾸준히 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는 사실도 이해한다.


나는 이런 낯선 기술들을 익히고 있다. ‘살면 살아진다’는 고도의 유연성을 생각해 보자. 비전이 사라지고 정체성이 흐릿해진 낯선 허공 앞에서 나는 길을 잃었다. 비우는 법을 배운 적 없는 나에게, ‘살면 살아진다’는 말은 아무것도 채우지 않아도 괜찮다는 가장 정직한 지침이다.


펜으로 천천히 글씨를 쓸 때, 그림을 그릴 때, 손끝으로 전해지는 단순한 업무의 질감을 나는 좋아한다. 때로는 정교한 로직과 목적 추구보다 '그냥'이라는 단순함이 더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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