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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Apr 19. 2023

25 겨울, 대기업 퇴사를 결심하기까지

2022년 12월 어느 날, 나는 열심히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기로 결정했다. 회사에 불만이 있거나, 하는 일이 나랑 안 맞다는 이유는 아니었다. 사실 회사를 다니는 일은 그리 힘들지 않았고, 비즈니스 컨설팅이라는 직무는 내게 아주 잘 맞았다. 새로운 문제를 받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해 결론을 만들어내는 일. 나는 문제를 해결했을 때 성취감을 즐기는 사람이었고, 내가 내린 결론을 기반으로 의사결정이 이뤄진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분명 모두가 원하는 회사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일을 하고 있음에도 나는 내 삶이 텅 비어 가고 있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나는 그동안 나에게 맞는 직무를 찾기 위해 누구보다 노력했다. 인턴 4번, 대외활동 약 10회, 창업 시도를 한 뒤였고, 취업을 하는데 필요하다는 자격증 3개와 공모전 수상 경험, 어학 성적과 높은 학점까지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나는 열심히 내가 좋아하는 직무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지만, 내가 왜 일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며 무엇보다 내가 언제 행복함을 느끼는지 또 어떤 걸 할 때 스트레스가 해소되는지 잘 몰랐다. 열심히 일하는 선배들을 보면서 존경과 동시에 답답함을 느꼈다. ‘나 이 짓을 몇 년을 더 해야 하는 거야? 나 이러다가 그냥 죽는 거 아냐? 나 과연 여기서 행복할 수 있을까?’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이 생각은 종종 자주 나를 잠식시켰다.


그러다가 알게 된 것이 갭이어였다. 갭이어란, 학업을 잠시 중단하거나 병행하면서 봉사, 여행, 진로탐색, 교육, 인턴, 창업 등의 활동을 체험하며 흥미와 적성을 찾고 앞으로의 진로를 설정하는 기간을 말한다.


이 정의처럼 학업 중에 갭이어를 가질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직장에 취업하고 나서 혹은 이직을 준비하는 기간에 갭이어를 갖는 듯하다. 분명 일정한 나이에 어떠한 성과를 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나 역시도 그랬다. 사실 나는 23살부터 휴식을 원했다. 나와 삶에 대한 가치관을 정립하고, 삶을 대하는 태도를 점검하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하지만 내 이런 말은 누구에게도 설득되지 못했다. 남들은 인턴 한다는데, 남들은 대외활동 한다는데, 남들은 남들은. 항상 이 남들이 문제였다. 누구에게도 뒤쳐지고 싶지 않았던 나는 결국, 휴식은 늘 뒤로 남겨둔 채 뭔가를 성취하기 위한 삶을 택했다.


그렇게 묻어뒀던 욕망은 정규직 전환을 얼마 앞두지 않은 어느 날 빵하고 터져버렸다. 당시 나는 정규직 전환 전, 2주간의 휴가를 승인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2주간의 휴가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2주 호주 여행을 포기하든가, 정규직을 포기하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

내 상사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갭 이어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누군가 듣는다면 철없는 결정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깟 2주 휴가가 뭐라고 정규직을 포기해?’ 그러나 2주 간의 해외여행은 내게 그만큼 특별한 것이었다. 갭 이어를 떠나기 무서웠던 내가 현실과의 타협안으로 설정해 놓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입사 때부터 나만의 작은 휴가를 미루는 것에 순응한다면, 앞으로 내 삶에서 나를 위한 시간은 존재하지 않을 거 같다는 강렬한 신호를 느꼈다. 그렇게 나는 그토록 원하던 회사의 정규직 전환을 포기한 채 2주 휴가를 떠났다. 그리고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겠다고 다짐했다.


사실 휴가를 떠난 뒤에 내가 얼마나 충동적이고 용감한 선택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시드니, 멜버른, 브리즈번 어느 도시에서나 내가 속해있던 회사의 건물이 보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주 중심가에, 아주 큰 건물에. 그 건물들을 마주할 때마다 나 이렇게 큰 회사를 그만둔 거야? 하고 생각하며 씁쓸한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으로 현실을 느끼게 한 것은 돈이었다. 평균 월세 100만 원과 한 달 생활비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결국 나는 주 40시간을 일 해야 했는데, 그렇다면 회사를 다니는 것과 뭐가 다른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가 워킹 홀리데이를 선택한 이유는 나를 둘러싼 환경을 바꾸고 싶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무리 외면하려고 애써도 한국에서 취업이라는 압박을 피하기는 어려울 거 같았다. 앞으로 1년간 세상에, 사람들의 시선에 나를 제한하지 않고, 삶과 나의 관계를 치열하게 숙고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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