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사장님과의 마지막 오찬
퇴사를 70일 앞 둔 오늘. 사장님께서 우리 부 전체에 점심을 먹자 하셨습니다. 사장님께서는 외부 일정이 없으시면 구내식당에서도 점심을 자주 드시고 직원들과 점심자리도 자주 만드시려 하십니다. 수 천명 직원을 소탈하고 온화한 모습으로 이끄시는 모습이 참 존경스럽습니다. 공직생활을 오래 하셨는데도 전혀 권위적이지 않으시고 매너나 말씀은 점잖은 사람 그 자체입니다. 거기다 박학다식하시고 말씀도 워낙 잘 하셔서 식사자리가 즐겁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사장님과의 오찬자리가 제게는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어쩌면 사장님과의 마지막 식사자리일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자주 뵙지는 못했지만 사장님의 인품과 경영철학에 감동했었습니다.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이 어떤 의미로 쓰이는지는 모르나, 저는 사실 사람에게 충성합니다. 대신 모난 성격 덕에 사람 가려 충성합니다. 충성할 수 있는 사장님을 모셔서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어느 때보다 열정을 불살랐던 것 같습니다.
마음 속에 헤어질 결심을 품고 있으니 괜히 제 발 저렸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드리는 것이 깜찍하게 누군가를 속이는 것 같은 마음이 드는 것은 그동안에 정이 많이 들어서일거라 생각하지만, 아무튼 마음이 편치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장님 말씀 때문에 마음이 더 불편해 지고 말았습니다.
사장님은 저를 가리키며,
"우리 김 팀장은 나랑 입사 동기나 마찬가지잖아.
내가 우리회사 취임하고 제일 먼저 한 게 법무팀 제대로 정비한 일이었지.
이 큰 회사가 사내 변호사도 없이, 법무팀장 자리도 공석으로 돌아가고 있더라구.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 내가 우리 팀장님 뽑고 법무팀 보강하고. "
라고 하십니다.
사장님 저는..... 저는 사실 퇴사를 결심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이으셔서,
"법무팀 업무는 티도 안 나고 성과를 보여주는 것도 아닌데
뒤에서 챙길 게 참 많지요.
모르는 사람들은 뭐 하는지도 모르지.
해 봤자 티도 안나고 알아 주지도 않는데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그런데 나는 우리 법무팀에 대단히 만족하고 있어요. "
라 하시니. 사장님, 이러시면 나가려는 제 마음이 너무 무거워 집니다.
나가려는 제가 죽을 죄인입니다.
오늘의 오찬자리는 우리팀과 같은 부 안에 속한 다른 팀의 업무 성과를 격려하기 위함입니다. 사실상 우리팀은 옆 팀 덕분에 꼽사리 낀 것이었습니다. 꼽사리로 밥 사주시는 것만도 감사한데, 성과라고 내 놓은 것도 없는 저희를 추켜세우고, 다독여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 법무팀장이라는 놈은 뽑아준 은혜도 모르고 퇴사할 생각입니다만.
이 회사를 입사할 때부터 퇴사를 염두에 두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업무를 하며 마주한 높고 견고한 벽과 한계, 그것들로 인한 무력감과 자괴감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도 과거의 관습에서 벗어나 변화한 시대에 맞게 매뉴얼을 갖추고 리스크를 관리하겠다는 사장님의 의지가 있으니 사장님이 계시는 동안에는 제 역할을 제대로 해보자는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큰 조직은 사장님 한 분만의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과거의 잘 못을 파헤치려는 게 아니라 지금부터라도 비정상적인 것을 바로 잡아 나가려는 저의 진심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바로 잡지 않으면 언젠가 사고가 터질지 모른다는 말은 그러면 그동안에 했던 것은 뭐가 되냐는 말 앞에서 매번 좌절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내가 없는 동안에도 무탈하게 잘 이어온 회사이고 내가 나간 뒤에도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무탈하게 존속될 회사입니다. 내가 무슨 자격과 의지로, 뭘 바로 잡을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눈 감고 귀 막기엔 나에게 직업윤리라는 것이 있고, 말씀드린 것처럼 사장님께서 나를 뽑으며 기대하신 역할이란 게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것들은 항상 후순위로 밀리게 됩니다. 그게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변명을 해본들 무엇할까요. 남은 시간 동안 맡은 바 소임을 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퇴사 후에도 신의는 지키겠습니다. 뭐가 그리 심각하냐 물으시면, 그만큼 우리 사장님이 좋은 분이셨습니다. 사장님이 계시는 동안 이 회사를 다닌 것이 저에겐 행운이었습니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로 모를 사장님과의 오찬에 만감이 교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