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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좀하는 엄마 Apr 01. 2021

여자, 남자, 그리고 제3의 성 ‘엄마’

‘디어마이프렌즈’ 드라마 속의 엄마들과의 만남


‘엄마’가 됐다. 


어릴 때부터 늘 ‘엄마’가 있었지만 ‘엄마’가 뭔지 잘 몰랐다. 이 세상에는 경험해 보지 못하면 모르는 세계가 있는데 ‘엄마’라는 세계가 내게는 그랬다. 정말 잘 몰랐다. 그러다가 임신을 하고 출산하고 양육하면서 ‘엄마’가 됐고 어느새 두 아이의 ‘엄마’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엄마’가 되기 전과 후로 내 삶을 나눌 정도로 엄마가 된 일은 내 인생이 확장될 정도로 큰일이었다. 생각하고 기대한 것보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기쁜 일이기도 했지만 힘들고 외롭고 두려운 일이었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뭘까? (출처 : pexels)

아이를 잘 키워내고 자식들과 조화롭게 살 궁리를 하는 일은 매우 어려웠다. 마음의 준비를 한다고 해서 술술 풀리는 일이 아니었다. 어느 때는 감으로 엄마의 역할을 감당해야 했고 어느 때는 ‘엄마’에 대한 정보가 무한대로 필요한 때도 있었다. 지식이나 정보대로 한다고 해서 자식과 합이 맞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현재 육아에 전념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 일이 버거울 때가 많다. 그런데 70년, 80년을 살아낸 엄마들은 어떻게 그 많은 일을 감당해낼 수 있었을까. 육아뿐만이 아니라 학대에 가까운 시부모님들의 괴롭힘, 남편의 냉대와 무관심, 경제적인 어려움, 그리고 건사해야 하는 자식들과 그들을 바로 키워야 하는 책임감, 등등. 그렇게 엄마들은 이 모든 것을 감내하면서 지금의 자식들을 키워냈다.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 만난 엄마들(출처:tvn)

<디어 마이 프렌즈> 드라마를 보면서 나는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자식들을 세상에서 살 수 있게 만들어 놓고 노년이 되어서 그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면서 다시금 홀로 남겨지는 그들.      


‘엄마’에게는 엄마의 역할을 강요하면서 자식들은 자식의 역할을 하지 않으려는 모습들. 그런데 그런 모습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세상의 인식. 작가는 그런 자식들을 보면서 염치없음으로 부모들의 아픔에 함부로 슬퍼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남편의 구박과 막말을 묵묵히 참으며 세 딸을 길러내고 세계여행을 꿈꾸며 새처럼 자유롭고 싶은 정아엄마, 남편이 벽장 속에서 돌연사하고 첫째 아들을 열병으로 잃고 가슴 아파하며 말년에 치매로 고통받는 희자엄마, 남편의 바람을 직접 목격하고 그 충격에 하나밖에 없는 딸을 소유물로 생각하며 집착했던 난희엄마, 거의 한 평생을 남편의 폭력과 바람에 시달리다가 말년에 병든 남편을 봉양하며 사는 쌍분엄마, 등     


이 드라마는 그런 엄마들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를 엄마들이 끝까지 버텨냈음을 보여준다. 비록 상처투성이긴 하지만. 그렇다면 어느 것 하나 녹록지 않았던 그 시기를 엄마들은 어떻게 견뎌냈던 걸까?      


그 버텨낸 원동력은 엄마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아마 ‘자식들’ 때문에 이 시기를 견뎌온 엄마들이 많을 거라고 추측해 본다. 드라마 속 엄마들처럼 실제 나의 엄마도 이렇게 힘든 시기를 보냈다. 언젠가 한 번 어떻게 그 시기를 버틸 수 있었는지 물은 적이 있다. 그때 엄마의 대답이 바로 ‘자식들’ 때문에였다.     


나는 아직 어린 자식들을 기르는 중이지만 ‘엄마’가 되고 나서야 그 말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힘들고 괴롭더라도 자식들 얼굴이나 사진을 보고만 있어도 힘이 나는 요상스러운 세상에 나도 살게 되었다. 힘들어도 포기하거나 주저앉지 못하는 그런 세상에 ‘엄마’로서 나도 살게 된 것이다. 나도 모르게 자식이 전부인 세상에 발을 담그게 된 것이다.     

 


‘엄마’가 되고 보니 한편으론 그동안 재미있고 좋았던 경험이나 일들이 많이 재미없어졌다. 하고 싶은 일도 딱히 없어지고 갖고 싶은 물건도 별반 없어졌다. 젊을 때 흥미로웠던 일이나 신나는 일들이 그냥저냥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로 바뀌어 버렸다. 자연스럽게 그냥 ‘엄마’로서의 삶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디어 마이 프렌즈>에 보면 남자와 썸타는 엄마에게 자식이 “엄마, 여자 같아 보인다.”라고 이야기하고, 남자 친구와 데이트하는 엄마를 보면서 “그러지 말라.”고 화를 내기도 한다. 그런 자식들의 반응에 엄마 또한 “남사스럽다, 부끄럽다, 다 늙어서.” 등의 반응을 보인다. 마치 ‘엄마’가 되는 순간, ‘여자’라는 성에서 제외된 것처럼.     


생각해보면 우리는 엄마가 여자인 것이 불편한 것 같다. ‘엄마’는 ‘엄마’로 남아야 하는데 ‘엄마’가 ‘여자’가 되는 순간 다른 존재가 된 것처럼 과민반응을 보인다. 도대체 엄마는 뭐여야 하는 걸까?     


엄마가 되면서 여자로서 생명력을 잃고 다른 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일까? 자식만을 위해서, 그리고 가족을 위해서 무한대로 희생해야 하는 존재가 바로 엄마인 걸까? 마치 엄마들은 불가능한 미션이 삶 가운데 가득해도 톰크루즈보다 더 그 미션을 잘 수행해야 하는 책무가 있는 것처럼 그 미션을 잘 수행하면 칭찬을 받고 잘 해내지 못하면 비난과 손가락질이 쏟아진다. 그런데도 엄마들은 그런 사회적 인식을 자연스럽게 내면화하면서 살아내야만 했다.      

예전 엄마들은 불가능한 미션을 수행하며 삶을 살아냈다. (출처:tvn)

내가 ‘엄마’가 되고 나서부터 나는 그런 ‘엄마’들의 삶에 공감하며 그 시대를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그녀들의 삶이 안타까웠다. 만약에 나에게 그런 삶을 감내하라고 한다면 ‘나는 삶을 온전히 온몸으로 받아내면서 자식들을 제대로 길러낼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마저 들었다. 그리고 <디어 마이 프렌즈>를 보면서 그런 연민과 안타까움은 더 깊어졌다. 이러한 삶 속에서 ‘엄마’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제3의 성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예전에는 ‘엄마’들 대다수가 가족이나 자식을 위한 희생과 헌신을 강요당했다. 하지만 지금의 ‘엄마’들은 그렇게 살기에는 너무 다른 시대, 너무 다른 환경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기존의 ‘엄마’라는 이미지에서 탈피해서 우리는 새로운 ‘엄마’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존의 ‘엄마’들에게는 무한한 관심과 연민, 사랑을 가지되 그러한 존재를 그대로 흡수하기보다는 새로운 ‘엄마’가 되어서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 나는 아직 초보 엄마에 불과하고 이렇게 새로운 ‘엄마’의 길을 찾기에는 역부족이다. 하지만 앞으로 자녀들을 키워내면서 이 길을 적극적으로 찾아보고자 한다.  

    

새로운 '엄마'의 길을 찾아야 할 때다.(출처:pexels)

만약 ‘엄마’가 제3의 성이라면, 더욱더 탐구하고 사색하며 가장 좋은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기존의 엄마들이 대단하다고 느끼지만, 나는 그들의 길을 그대로 걸어가고 싶지는 않다. 내 딸들에게도 그런 그들의 길을 그대로 걷게 하고 싶지 않다. 지금부터 내가 새로운 ‘엄마’의 길을 찾아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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