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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이 켜두고 간 불빛
상실을 지나온 사람들이 붙잡는 곳들에 대해서
by
윤슬
Nov 26. 2025
상실은 어느 날,
마음 깊은 곳에서 작은 균열처럼 일어난다.
아무도 모르게,
그러나 너무도 확실하게
삶의 결을 바꾸며 스며든다.
혼자 남은 집안은
낯선 영혼처럼 느껴졌다.
문을 닫자마자
공기가 멈추고
침묵이 벽에 들러붙어
나를 천천히 감싸오는 느낌이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침묵에도 무게가 있구나’
그 사실을 배웠다.
그래서 TV를 켰다.
빛이 방 한가운데서 작은 심장처럼 뛰기 시작했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가
살아 있는 증거처럼 방 안을 떠돌았다.
나는 그 곁에 앉아
마치 오래된 털목도리라도 두른 것처럼
조금은 덜 추운 마음으로 밤을 넘겼다.
그제야 깨달았다.
사람들은 누구나
상실이 만든 빈자리에
작은 대체물을 놓아두고 산다는 것을.
그게 TV일 수도,
휴대폰일 수도,
누군가의 체온이나,
사라진 관계의 잔향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렇게
무언가를 손에 쥐고서야
비로소 하루를 건너간다.
상실은 빈방을 만들고
우리는 그곳에 불빛 하나를 놓는다.
상실은 마음에 문을 하나 더 만든다.
그 문 너머에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감정이
바람처럼 누워 있다.
그 바람을 마주하기 어려울 때
우리는 대체물을 들인다.
소리든, 화면이든,
온기든, 작은 움직임이든.
그 모든 것은
“괜찮아, 너 혼자 아니야”
라고 말해주는 방식이었다.
그건 약함이 아니라
사람이 견딜 수 있는 최소한의 숨이었다.
나를 지키기 위한 본능,
살아남기 위한 작은 기술.
왜 우리는 화면에 마음을 기댈까
1. 고요는 마음의 그림자를 너무 또렷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선명한 고요는 때로
가장 잔혹한 거울이다.
우리는 그 거울을 잠시 흐리고 싶어
소리를 켜고, 빛을 켠다.
2. 끊어진 연결을 대신 이어주는 존재라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틈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한 추위가 있다.
화면 속 온기는
그 틈을 잠시 덮어주는 얇은 담요가 된다.
3. 멈춰버린 나 대신
세상이 계속 움직이고 있음을 확인하고 싶어서
세계가 여전히 흐르고 있다는 사실은
정지된 마음에게 작은 구명줄과도 같다.
치유는 상실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상실 위에 다른 빛을 켜는 일이다
의존을 억지로 끊으려 하면
마음은 더 세게 움켜쥔다.
치유는 천천히—
조금씩 다른 곳에서
안전함을 발견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1. 낯선 방에 작은 온기를 놓아두기
향 하나, 조도 낮은 조명 하나,
차분한 색의 천 하나.
그냥 ‘앉아 있어도 되는 공간’이 되기만 해도
마음은 스스로 자리를 찾는다.
2. 소리의 숨을 바꾸기
TV의 소란 대신
잔잔한 음악이나
바람, 물의 결을 닮은 소리를 들여
고요와 천천히 친해진다.
3. 하루 10분, 고요와 마주 앉기
고요는 처음엔 낯설지만
언젠가는
나를 손상시키지 않는 존재가 된다.
4. 슬픔을 밀어내지 않는 연습
상실을 인정하는 순간,
그 빈자리에도 숨길이 생긴다.
바람이 들고, 빛이 드나들기 시작한다.
우리는 결국
기댈 곳을 작은 빛들로 만들어가는 존재다.
TV든, 휴대폰이든,
누군가의 이름이든,
아니면 아주 오래된 기억이든.
그것들은 모두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붙잡는
조그만 등불들이다.
중요한 건
그 등불이 나를 태우지 않고
조금씩 나를 데워
다음 순간으로 데려가는 일.
나는 아직
고요와 완전히 화해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고요가 내 적이라는 생각을
천천히 내려놓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앞으로 조금씩
빛이 드는 방향으로 걸어가는 중이다.
화면 옆에서 자라는 것들
낮은 불빛 아래
나는 조용히 흔들렸다.
세상은
화면 속에서만 말하고 있었지만
그 목소리가
내 어둠을 조금은 덜 무겁게 했다.
상실은 길을 잃게 했지만
의존은, 그 길을 잠시 밝혀주는
작은 손전등 같았다.
언젠가,
빛을 끄고도 걸을 수 있을 만큼
내 마음이 단단해지면,
나는 그때야 비로소
고요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리라.
그리고 그 고요 속에서
나 역시
누군가에게 작은 불빛이 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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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슬, 글로 마음을 어루만지며 외로움과 상처에 위로를 전하는 작가 .생태와 일상 , 작은 생명에 관심을 주는 시인, 에세이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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